취재파일

'전설의 고향'도 아닌데…도심 속에 흉가마을 왜?

면리장 침 2013. 6. 22. 12:48
*블로그 만들면서 작년과 올해 썼던 취재 뒷얘기(취재파일)을 옮겨옵니다.
2013.4.29. 작성

지금 사는 동네에 빈집이 얼마나 되는지 아시나요?

통계청 조사로는 전국에 빈집, 공가나 폐가가 80만 가구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사라든가 세입자 교체로 인한 공백 등으로 인한 빈집이야 노상 생기겠죠.

문제는 이런 빈집들이 몰려 있는데다 오래 비어있을 때입니다. 정비사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빈집이 그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서울만 보면 현재 80개 구역 4천여 채의 집이 비어 있습니다. 거주민들의 이해가 엇갈리면서 혹은 이주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아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길게는 10년 넘게 정비 사업이 지연되는 곳들도 있죠.

지난주 찾아간 서울의 한 재개발구역은 전체 7백여 동 중에 6백 동 넘게 비어있었습니다. 공가율이 87%에 이릅니다. 곳곳에 가림막을 쳐놓고 일부 집들은 철거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저 빈집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낮에도 인적이 드물었습니다. 한참을 돌아본 뒤에야 주민 몇 명을 만날 수 있었는데 다들 오랜 사업 지연에 지쳐 있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구역 안쪽으로는 다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즉, 집에서 구역 밖으로 나가는 최단거리만 이용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밤에 다시 찾아가봤습니다. 건강한 성인남성 4명이 차를 타거나 걸어서 동네를 둘러보는데도 솔직한 마음으로 무서웠습니다. 가로등 불빛 몇 개를 제하고는 어두컴컴한 속에 희미하게 깨진 유리창이나 부서진 문짝 등의 실루엣이 드러나는데 금세 뭐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모습. 이런 집이 6백 채 넘게 있으니까 '흉가 마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짓다가 만 건물들도 문제였습니다. 정비사업 구역에 있는 빈집은 대개 단독주택이나 다세대주택으로 규모가 작습니다만, 10층, 20층 규모의 빌딩을 짓다가 자금 부족이나 업체 부도, 소송, 분쟁 등으로 공사가 중단된 건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처리가 시작된 걸 제외하면 전국에 442곳, 서울에는 26곳이 있었습니다. 평균 방치기간은 9.7년, 공사가 중단된 뒤 10년 정도씩 그대로 멈춰 있는 겁니다.

사실 황당했습니다. 도시에 녹지공간이 부족하다면서 도시공원을 곳곳에 짓고 한강 경관 해친다며 한강변 아파트 층고 제한하고 이렇게 도시 미관과 주거 환경 개선도 적극 고려하는 게 최근 도시 계획의 추세 아닌가요. 그런데 이런 흉가 마을이나 흉물스런 공사장이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다니요. 말 그대로 '도심 속 흉물'인 이유는, 정말 지하철역이나 도심의 주요 거리와 가까운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걷거나 차를 타고 이동하면, 골목만 접어들면 바로 나타났거든요.

제가 20년 가까이 살던 동네에도 그런 곳이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공사 중단 건축물 현황 자료를 입수해 각각의 주소지를 살펴보다보니 너무 익숙한 주소라 찾아가봤습니다. 제가 학생이던 시절 공사가 중단돼 지금까지 방치돼 있는 건물이었던 겁니다. 성당 가던 길목에 있던 곳이라 기억도 생생.. 엄마가 그리로 가지 말라고 했던 것까지 기억나네요.이미지2010년 2월과 3월, 전국의 시선은 부산의 한 남성에게로 집중됐습니다. 이름은 김길태. 당시 33살, 중학생이었던 13살 이 모양을 납치해 성폭행하고 살해까지 한 뒤 도망다녔던 바로 그 자입니다. 피해자의 집은 부산의 재개발 예정 지역에 있었습니다. 김길태의 집도 그 근처, 범행장소도 부근, 김길태가 숨어지냈던 곳도 이 지역의 빈집이었습니다.

재개발 지역이라고 해서 모두 김길태 같은 이들이 활동하고 있는 곳은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범죄자들이 이용하기 쉬운 환경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인적이 드물고 출입 통제도 안되고 치안도 허술하니까요. 그러면서 도심에 있어 접근하기도 좋습니다.

경찰은 김길태 사건 등 강력 범죄가 잇따라 일어남에 따라 성폭력 범죄 특별관리구역을 만들어 특별관리를 시작했습니다. 2013년 2월까지 전국에 98곳이었는데 3월부터는 두 배 넘게 늘렸습니다. 250곳, 이중에서 재개발 지역은 83곳에 이릅니다. 새 정부가 지정한 '4대 거악' 중 하나인 성폭력 방지를 위해 적극 나선 것으로 추정됩니다. 필요한 조치입니다. 하지만 계속 늘어가는 우범지대를 관리 잘 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겁니다.

정치권에서도 해법을 내놨습니다. [공사중단 장기방치 건축물의 정비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안]이 그것입니다. 2년 이상 공사가 중단된 채 방치된 건축물은 실태조사를 거쳐 미관 저해, 안전 위해 등으로 판명되면 시도지사가 건축주에게 철거 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게 주요 내용입니다. 4월 22일에 법제사법위까지 통과했습니다. 본회의까지 통과하면 6개월 뒤부터 시행됩니다. 본회의 통과 시점이라든가 현재 방치된 건축물에까지 소급적용되는지 하는 부분은 더 지켜봐야 하지만 어쨌든 그동안 방치 건축현장에 대해 아무런 관련 법이 없던 데 비하면 큰 진전입니다.

다만 지자체장이 철거가 불가피하다고 판정해 철거 명령을 내리더라도 사유재산 침해 등을 주장하며 건축주가 듣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각종 분쟁이나 소송에 연루돼 있는 경우에는 섯불리 집행하기도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정비 사업이 지연 중인 구역에는 별다른 해법이 없어보입니다.

더 효과적인 해법이 나오지 않는다면 '제2의 김길태'가 숨을 곳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