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무슨 말일까?.. 외국어에 '오염'된 공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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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석 달 사이 중앙정부에서 발표한 보도자료에서 사용된 말입니다. 국립 국어원이 3월부터 6월까지 거의 무작위로 정부기관 보도자료를 분석해보니(전수조사는 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뜻이 분명하지 않거나 불필요하게 사용된 외국어 낱말이 3백 개가 넘었습니다.
국립 국어원의 공공언어지원단에서 진행한 '행정기관 공공언어 상시점검' 결과인데 국어원에서는, 이 보도자료를 작성한 기관에 이를 개선하라고 권고하는 공문을 일일이 보냈습니다. 석 달 동안 보낸 공문이 62건입니다.
국어원은 공문을 통해 해당 보도자료에 사용된 표현을 지적하고 이 표현의 문제점은 "뜻이 불분명하여 정책 이해에 지장을 줄 수 있는 표현 사용" "우리말 제시 없이 외국어, 외국 문자 사용(국어기본법 제14조 미준수)"라고 밝혔습니다. 또 개선 방안으로 대체할 수 있는 우리말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아래가 국어원에서 제시한 대체어입니다.
육아용품 묶음, 금융 안정성 검사, 위험 요인, 인권 지킴이, 지능형 전력망, 수요, 연결, 계획, 착수 회의, 창업 지원, 창업(Start-up), 외국인 직접 투자, 강소기업, 행동 강령, 황금 종자, 현지 생산 식품, 유통조직, 장벽 제거, 열린 창구,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접촉, 청년층 해외취업 지원 프로그램, 불일치, 주력 상품...
앞의 말에 비해 한결 이해하기 쉬워졌죠?
국어기본법 제 14조는 이렇습니다.
제14조(공문서의 작성) 공공기관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 다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괄호 안에 한자 또는 다른 외국 글자를 쓸 수 있다.
대통령령에서 정한 경우는 또 이렇습니다.
1.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
2. 어렵거나 낯선 전문어 또는 신조어(新造語)를 사용하는 경우
즉, 외국어나 외국 글자를 사용할 수는 있지만 일단은 한글로 적고 괄호 안에 원어를 적는 게 법에 맞는 올바른 표현법입니다. (사실 이 조항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외국어를 한글로 적기만 하면 괜찮다는 것이기 때문이죠. 즉 'stress test'를 '스트레스 테스트'라고 적으면 문제 없다는 한계가 있는 조항이긴 합니다.)
'국어기본법 제14조 미준수'라고 점잖게 표현했습니다만, 사실 엄연한 위법, 불법입니다. 국어기본법에 처벌 조항이 없기 때문에 국립 국어원에서 고소, 고발이나 수사 의뢰를 하지 못하고 단지 권고만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국어원 조사는 이 정도에 그쳤지만 더 심도 있게 조사한 자료도 있었습니다. 시민단체인 한글문화연대에서 지난해 3월부터 5월까지 역시 석 달 동안 정부 보도자료 2,869건을 조사했더니(이 기간 14개 정부 부처에서 나온 보도자료 전부를 조사했다고 하네요.) 국어기본법 위반 사례가 12,895회 발견됐습니다. 보도자료 1건 당 평균 4.49회 위반입니다.
왜들 이럴까요?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옵니다. "외국어(거의 전부가 영어입니다..)를 사용하면 더 있어 보이는 사회 분위기 따라 공무원도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이다", "유학파가 많아지다보니 영어를 섞어쓰는 표현이 자연스러워서 그렇다", "다른 부서와 차별화를 위해 사용한다" 등등.
이런저런 이유가 혼재돼 있겠습니다만, 저는 위의 해석 외에 보도자료를 내는 것 자체가 실적이고 또 경쟁이 붙다보니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질보다는 양'을 추구하다 보니 정제된 표현을 찾아 쓸 여력이 없다는 말이죠.보도자료를 내는 목적은 정부 정책 홍보인데 이는 결국 국민의 이해와 동의를 구하기 위한 절차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그 진의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해 국민 다수가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그 정책을 집행하기 어려운 상황이 왕왕 발생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좋은 정책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는 것일텐데 어떤 보도자료를 보면 자료 내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알맹이 없는 자료나 재탕 삼탕 자료들이 가끔 눈에 띕니다. 저마다 일주일에 몇 건씩은 보도자료를 내야 하고 그렇게 자료 내는 데 급급하다보니 국어기본법 따위는 신경쓰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
(한글문화연대 설명으로는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국어기본법의 존재 자체를, 규정하고 있는 내용 자체를 모르고 있다고 합니다. 믿기 어렵지만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국민에게 알리고 국민의 이해와 동의를 받기 위한 보도자료인데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가는 보도자료, 국어원 지적처럼 "뜻이 불분명하여 정책 이해에 지장을 줄 수 있는" 그런 표현이 가득 한 보도자료를 내게 돼 정작 보도자료를 내는 목적에 부합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정부 보도자료 속에서도 이른바 '외계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생뚱맞은 줄임말이 판을 치고 스마트폰 메신저에서처럼 모음을 빼고 자음으로만 소통하는 상황도 흔합니다. 언어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고 하지만 맞춤법 자체가 파괴되고 외래어가 아닌 외국어가 우리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 드는 현상까지도 자연스럽다고 방치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정부에서 말이죠.
국립국어원도 여러 노력을 합니다만, 개선 권고 공문을 계속 보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식입니다. 같은 정부기관으로서의 한계 같습니다. 반면 지난해 한글날을 하루 앞두고 한글문화연대가 제시한 방안이 좀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입니다.
1. 정부는 국어기본법 제 14조에 규정된 공문서 한글 표기 원칙을 지켜라.
2. 정부는 각 부처의 국어책임관이 제대로 일하고 있는지 감독하라.
3. 정부는 공문서에서 외국어 낱말을 한글로 표기하는 행태를 중지하라.
4. 정부와 국회는 국어기본법 위반을 처벌하는 조항을 만들고, 우리말 우선 사용의 원칙을 만들어라.
기사에 미처 다 담지 못한 한글문화연대 이건범 대표의 말씀도 조금 더 옮겨보겠습니다.
"저는 정부가 예를 들면 문화체육관광부라든지 국립국어원 이런 정도 수준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헌법에서 얘기하고 있는 국민의 알 권리를 정부가 제대로 지켜내기 위해서는 범정부 차원의 언어 위원회라든지 이런 것이 만들어져야 되고 이게 대통령 직속이든 국무총리 직속이든 간에...일단 이런 보도자료들은 기본적으로 이쪽 검토를 받아서 나갈 수 있게끔 해주고..
또 프랑스에는 신조어 위원회 이런 곳이 있거든요. 외국에서 들어오는 많은 외국어들을 프랑스어를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서 프랑스어로 바꿔내는 작업을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거죠. 아카데미와 함께.. 저는 정부에서 우리 국어를 풍부하게 만들어가고 또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언어 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어가지고 각종 용어들을 바꿔내는 작업, 또 쉽게 만들어내는 작업을 함께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어 보호법에 따라 민간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지 않는 광고조차도 처벌하는 그런 강력한 규정이 있습니다. 우리 국어 기본법에는 처벌 조항이 전혀 없는데, 저는 처벌 조항이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은 해요."
올해부터 한글날이 22년 만에 다시 공휴일이 됐습니다. 그저 쉬는 날 하루 늘어난 게 아니라 한글날의 의미를 되새기는 차원에서라도 정부 보도자료 개선 작업을 정부가 주도해서 지금부터라도 해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외국어 남용한 보도자료를 보여드렸던 시민이 한 말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물론 기자들도 되새겨야 할 말입니다.
"...그냥 말로 자세하게 풀어서 쓰면은 확실히 알겠는데 이렇게 영어도 많이 섞어쓰고 이러면 어르신 같은 분들은 오히려 더 모르잖아요, 영어 같은 거 더 모르시고... 저희 학생들도 찾아봐야 알 정도인데 굳이 찾아보면서까지 정부 정책에 신경을 쓰진 않으니까. 이렇게 말을 섞어서 쓰면 관심을 덜 갖게 될 것 같아요."
"평소에도 어렵다는 생각 많이 하죠, 뉴스 봐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고. 뭐하러 이렇게 어려운 말을 쓰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냥 말을 쉽게 풀어서 쓰면 더 낫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