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치킨전(3.2), 소울푸드...
-다른 책은 좀처럼 진도가 안 나가고 있는데.. 이 와중에 새로운 책.
-한참 전 들어보고 읽어봐야겠다 싶던 <대한민국 치킨전>. 저자와 페친을 맺은지도 1년이 넘었는데도 정작 읽지 않았다. 어제 문득 생각나 서점에 들었으나 재고가 없다 하여 오늘 ebook으로 구매, 몇장을 넘겼더니 1장의 제목, "치킨이 어떻게 한국인의 소울푸드가 되었는가"다. 무릎을 탁 쳤다(고 글로 쓴다.)
-'치킨이 소울푸드'라고 몇번 말했더니 대개들 웃었다. '어이없다'가 주로, 약간은 비웃음도 느껴졌다.(자격지심일까?) '당신의 소울푸드는 뭐냐'고 비웃을 준비를 하고 되물을 수 있었으나 별로 궁금하지 않아 그러지 않았다. 내 소울푸드는 치킨 맞다. 다시 생각해봐도 달리 떠오르는 게 없다.
-사연이라면 이러하다.
나의 부모는 30여 년 전 한동안 치킨집을 운영했다. 페리카나 치킨.. 주로 어머니가 맡았고 아버지는 퇴근 뒤 가게로 와 늦은 밤까지 도왔다. 두 분의 귀가시간은 자정 무렵이었다. 대략 5년 정도 아닌가 싶은데 그렇게 5년을 산 것이다. 주 5일 근무제도 하기 전, 주 6일을 그렇게 살았다. 왜 치킨집을 하게 됐는지, 왜 그만 뒀는지는 잘 모른다. 돌아보면 참 고단한 일상이다. 점심 때 즈음 치킨집 문을 열어 준비하고 손님을 맞았다. 간간이 배달도 했다. 인건비 부담이었는지 배달직원 1명, 홀 겸 주방 직원 1명 정도를 썼던 것 같다. 프랜차이즈긴 했지만 지금보다는 정비가 덜 돼 있을 때다. 생닭을 받아서 일일이 칼로 토막내고 반죽에 묻혀 숙성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때 닭을 토막냈던 둥글고 두터운 왕도마가 떠오른다. 88년~89년에 시작해 92년~93년까지였던 것 같다. 아버지는 40대 중반, 어머니는 초반일 때부터 시작...지금 내 나이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주말에 가끔 어머니의 치킨집에 갔다. 처음엔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성내역까지 가서 다시 버스를 타고 갔다. 초등생이 가긴엔 꽤 장거리였다. 치킨 한 접시 얻어먹고는 책도 보고 tv도 보다 두분이 장사 마치고 집에 올때 같이 왔다. 사당동으로 옮겼을 때는 6학년이거나 중학생이었다. 중학생이었나보다, 자전거 타고 치킨집 갔던 걸 보면. 내 첫 자전거는 중학교 첫 시험 1등의 보상으로 아버지가 사준 것이니. 여름방학에 그 자전거로 가게로 가 오후에 가끔 배달도 했던 기억이 있다. 헐렁헐렁 알바의 보상은 역시 치킨 한 접시.
가게에 가지 않던 대개의 시간엔 집에서 부모를 기다렸다. 가끔 먹고 싶다고 전화하면 은박지로 싼 치킨 몇 조각을 분홍 바구니에 담아 가져왔다. 그 달달한 맛이란... 당시로서는 초등생, 혹은 중학생이 맛볼 수 있던 최고의 음식이었다.
어느 순간 치킨집을 정리했다. 어머니는 너무 힘들어서 그만뒀다고 했다. 치킨을 덜 먹게 돼 많이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치킨집을 하는 동안 지하 전세에서 2층 전세로 옮겼고 몇년 뒤엔 전세살이도 청산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집에서 결혼하기까지 16년을 살았다. 부모님은 그 뒤로도 몇년을 더 살다 재건축을 앞두고 이사했다.
나는 크게 부족한 것 없이 학창시절을 보냈다. 열심히 닭을 튀겨 팔았던 어머니 아버지 덕분이었다. 어려서 지하 전세방을 잠시 부끄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어려서였으나 지금 생각하면 그랬던 내가 부끄럽다. 치킨집을 했던 부모님은 부끄럽기는커녕 자랑스럽다. 지금 그 나이가 돼보니 알겠다, 어떤 노고였는지를.
-이런 사연 때문에 치킨이 소울푸드인 것은 아니다. 수백 마리를 먹어왔는데도 치킨, 특히 페리카나의 양념치킨이 여전히 맛있기 때문이다. 그게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