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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일기/북적북적

북적북적78/가사노동은 만악의 근원... '아내 가뭄'

북적북적78 '아내 가뭄' 듣기



"이렇게 무시무시할 정도로 모든 게 연결되어 있는 신세계에서 일과 가정을 나란히 놓고 보지 않으면 두 세계 모두를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느 한쪽이 가물면 다른 쪽도 가문다는 사실을, 비는 모두에게 이롭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르겠다."
 
민족의 명절 설, 연휴 절반이 지나갔습니다. 이번 명절은 어떠셨습니까. 즐거우셨나요? 제 주변엔 부담스럽다는 분들도 제법 있었습니다. 휴일의 연속- 연휴에다 민족의 명절이라는 설 혹은 추석이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요. 즐겁기만 했던 분도 더러 있겠지만 많은 분들이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상당 부분은 '제사' 혹은 '차례'라는, 조상님도 이제는 썩 반기지 않을 것 같은, 그 의식에서 비롯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여성 남성을 차별하는 대표적인 풍속이 차례 같습니다. '이런 명절 한가운데 읽어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회심의 책을 골라왔습니다. 그동안 한국인 저자, 혹은 일본인 저자의 책을 주로 읽었는데 처음으로 읽는 영어권 저자의 책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정치평론가 애너벨 크랩이 쓴 '아내 가뭄'입니다. 영어 제목은 'The Wife Drought'입니다. 
 
'아내 가뭄'은 말 그대로 비가 오지 않는 가뭄처럼 '아내'가 드물거나 적다,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특히 남성-여성 성비가 불균형해 이성 배우자와 결혼하는 여성이 적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저자는, 가사노동을 주로 하며 배우자를 지원하는, 그런 이를 '아내'라 부르고 있습니다. 남성도 아내가 없을 수 있고 여성도 아내가 없을 수 있으나, 대개는 여성이 아내가 없거나 드물다, 그런 '아내 가뭄'입니다. 아내가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아내 선망증'에도 시달리는 저자가 '아내 가뭄' 사태를 깨닫는 서장을 먼저 읽겠습니다.
 
"그는 오전 8시에 집에서 나와 하루를 온전히 보람차게 보내고, 두 손으로 근사한 점심을 먹고 집에 가서는 말끔하게 목욕을 하고 막 자려는 아기를 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인류가 이뤄온 온갖 사회적 진보가 그 친구한테만은 참으로 요상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막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남자는 아내가 있지만 여자는 아내가 없다. 세상이 그렇다."
 

"아내 없이 치러야 하는 현대의 철인 5종 경기에서 무참히 실패한 이야기는 널려 있다. 나는 주기적으로 '아내 선망증'에 시달린다... 매일 곡예를 하는 듯한 삶은 쉽지 않다. 하지만 여자들이 겪는 낭패를 매일 놓치는 남자들의 상황도 그만큼 비극이다. 분명 비극이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배제당한 채 그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는 게 참으로 서글프다."
 

저 또한 그동안 직장에서 여성의 유리천장이라든가, 육아휴직 맘 놓고 할 수 없는 현실, 일-가정 양립을 가로막는 배려 없는 직장 문화, 그런 데에 더 관심 가졌습니다만, 저자는 남성 쪽으로 눈을 돌립니다. '개인이 극복할 수 없는 문제'라고만 치부해놓고 있는데 실은 방향부터 잘못된 것 아니었냐는 거죠. 그간 헛다리 짚고 있었다는 게 저자의 일갈입니다. 들어보시죠.
 
"지금껏 우리는 여자들이 육아휴직을 할 때 불이익을 받지 않는 식으로 평등을 쟁취하려 했다. 그러나 누구든 일을 쉬면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사실을 그냥 받아들이고 대신 그 책임을 고르게 나눌 방법을 찾는 것은 어떨까?... 남성들이 일터에서 나가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장벽은 없을까? 유리 비상계단이 있다면?"
 
"국가의 일반적인 고용 패턴을 보면, 여자들은 아이가 생기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형태로 일하고 싶어 할 거라고 낙인을 찍어놓는다. 반면 남자들은 아이가 생긴다고 해서 자신의 일에 변화가 생길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남자 스스로도 근무 패턴을 바꿀 생각이 없지만 가족들도 대부분 그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게다가 고용주들도 그쪽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이 사실을 남자들이 이미 알고 있다."

 

'가사노동 불변의 법칙'이란 걸 설명합니다. '남성은 무조건 여성보다 가사노동을 적게 한다'입니다. 일하는 남성이든 일하지 않는 남성이든, 심지어 일하지 않는 남성이 일하는 여성보다 더 적게 하기도 합니다. 한국만 그런 줄 알았더니, 오스트레일리아는 훨씬 선진국인 줄 알았더니, 물론 한국보단 낫습니다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들어보시죠.
 
"집안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대부분 여자 잘못으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아이가 보살핌을 제대로 못 받거나 집이 더러우면, 부주의하다면서 여성을 맹비난한다. 여성과 남성이 청결에 대해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남녀의 득실이 다르기 때문이다... 육아가 궁극적으로 엄마의 몫이라는 인식은 여자의 모든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잘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종종 군소리 없이 받아들인다."
 
"여자들은 전일제 근무를 할 때조차 남자보다 집안일을 더 많이 한다. 그리고 남자들은 백수일 때조차 여자들보다 집안일을 더 적게 한다. 이것이 아내 가뭄의 이상한 현상이며, 표면적으로도 우리를 확고부동하게 움켜잡고 있다. 여성은 전업주부가 아닌데도 전업주부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리고 남자는 전업주부와 결혼하지 않았을 때도 전업주부와 결혼한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

 

'여성이 본성상 가사노동에 더 적합하고 더 잘한다'는 편견 아닌 편견에 대한 장이나, '아이가 없어도 있어도 욕먹는 여성 정치인' 같은 내용이 담긴 장들도 흥미롭습니다. 남성이 생계를 부양해야 한다는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이 실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허구의 신화인데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현실에 대한 분석도 날카롭습니다. 결국은 남성들이 달라져야 할 부분, 어떻게든 가족을 보호하고 돈도 벌어야 하며 요즘 요구되는 새로운 역할도 해야 한다는 여러 모순된 기대에 시달리는 남성을 위해 필요한 게 뭐냐, 바로 '페미니즘'이라고 페미니즘은 언급하지 않지만 그렇게 자연스럽게 정리되는 흐름입니다. 
 
한국 상황은 어떨까요. 여성학자 정희진 씨가 이 책의 해제를 썼는데 한 대목을 옮기면 이렇습니다.
 
"일과 가정의 양립? 이미 많은 여성들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가장 먼저 일자리를 잃고 있으며, 더 이상 가정을 구성하지도 않는다. 아이를 낳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남성이 가사노동을 절대로, 죽어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저출산은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아니다.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여성들은 더 이상 국가, 사회, 남성 개인의 변화를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여성들은 진화 생물학적 관점에서 아이를 낳지 않음으로써, 사회를 구하고 자신을 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출산은 절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저는 거의 3년 전인 2014년 3월에 '여성의 날'을 앞두고 '가사노동은 만악의 근원?'이라는 취재파일을 쓴 일이 있습니다. 그 취재파일을 오디오로 읽은 게 팟캐스트 목록 저 아래에도 있습니다. 때로는 무심코 던진 말이나 갈겨쓴 글이 진실의 한가운데를 겨냥할 때도 있죠, 인생의 아이러니인데 '가사노동은 만악의 근원?'이라는 저 표현이 그러했다고 여겨집니다. 저도 모르게 그냥 쓴 게 핵심이었던 겁니다. 제게 좀 더 많은 지식과 면밀한 관찰력과 날카로운 통찰력에 숙성된 사고력 등이 있었다면 '아내 가뭄'과 같은 책으로 발전할 여지가 있었겠습니다. 
 
제 취재파일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냈습니다. "많은, 깨어있는 남성들이 자기 집에서부터 실천하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한다". 그 생각, 아직 유효합니다. 긴 시간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