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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일기/북적북적

북적북적75/왜 정의는 늘 지연될까..'지연된 정의'

북적북적75 '지연된 정의' 듣기


"박 기자와 나는 이른바 'FM'대로 살지 않았다. 아니, 살지 못했다. 남들보다 늦거나 재탕을 반복했다. 인생이 지연됐다. 지연된 인생들이 힘을 합쳤다. 16,17년 동안 지연되었던 정의를 찾았다. 이것도 운명일까."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구호를 내건 그 정권이 실은 쿠데타와 광주의 피를 통해 집권한 독재정권이었지요, 나이 들어 그런 헛된 구호를 떠올리며, 이 오염된 '정의'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에 살고 있는 걸까요. '느린 민주주의'라는 표현도 나왔지만, 때로는 느려도 너무 느린 정의, 언제 오는지 아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 한순간 훅 들어오기도 하죠. 변명 같지만 이명박 정권 말기 비판의 날을 한껏 세웠던 SBS를 비롯한 언론들이, 다시 5년 주기로 이번 정권에서도 그러겠다 짐작이야 했지만 이렇게 벼락 같을 줄은 몰랐습니다. 


 오늘 읽을 책은 지연된, 그러면서도 외면받던 정의에 대한 책입니다. 미성년자, 지적장애인, 가난한 이들.. 사회적 약자에게는 더욱 더 느리고 더딘, 그것도 의인들의 노력에 의해 간신히 찾아올 수 있었던 '지연된 정의'에 관한 이야기, 제목이 '지연된 정의'입니다.

 

 책에는 백수가 된 10년 경력 기자와 파산한 변호사가 만나 의기투합해 문제의 사건 3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 사건 중 첫번째는 삼례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 사건입니다. 


 전북 삼례 나라슈퍼에 새벽에 3인조 강도가 들어 금품을 빼앗고 할머니를 숨지게 했습니다. 경찰 수사에서 18살, 19살, 20살인 청년 3명이 강도 치사 사건의 범인으로 몰립니다. 셋다 지독히 가난하고 가정환경은 불우합니다. 2명에겐 지적 장애가 있습니다. 중학교까지만 간신히 졸업했거나 중퇴했습니다. 이들은 길게는 5년 6개월을 교도소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16년이 지나도록 누명을 벗지 못했습니다. 경찰은 범인을 조작했고 진범이 나타났는데도 이를 은폐했습니다. 진범이 나타난 그 대목부터 읽겠습니다.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약 1년 뒤 부산지방경찰청에서 전화가 왔어요. 강도에게 빼앗긴 패물에 대해 묻더라고요. 그쪽에서 말하는 패물 모양, 색깔이 내가 잃은 것과 똑같더라고요! 참 이상하다 싶었죠."


오래전 아버지처럼 형사가 말했다. "그대로 그려."

강인구는 다시 글을 그렸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일단 그렸다. 친구들과 나라슈퍼에서 강도짓을 하다가 할머니를 죽였다는 내용의 자술서. 강인구는 형사에게 또 맞을까 봐 자세히, 신중하게, 천천히, 정성을 다해 자술서를 그렸다.


"너희 똑바로 말해! 너네가 나라슈퍼 할머니 죽게 했지? 맞잖아!"

겁에 질린 강인구는 "네, 우리가 범인이에요."라고 말했다. 그 순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진범 3인조' 중 한 명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강인구의 얼굴을 바라봤다. 다시 고개를 숙인 진범은 소리내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강인구는 다시 교도소로 돌아갔다.


법원의 확정 판결이 난 사건에 대해 재심을 신청하고 이를 뒤집는 건 대단히 어렵다고 합니다. '법의 안정성' 때문에 법원은 재심을 잘 받으려 하지 않는다고 하죠. 일리가 없진 않습니다. 하지만 명백한 수사당국의 잘못이 있고 이로 인해 억울하게 인생의 소중한 시절 여러 해를 교도소에서 보낸 이들에게는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겁니다. 

약자들의 재심 사건만 전문으로 하다보니 수임료도 받지 못해 파산해버린 박준영 변호사는 이런 사건 중 하나인 삼례 3인조 사건 재심을 끈질기게 신청했고 5년이 걸려 무죄로 이끌어냈습니다. 박상규 기자는 이 과정을 함께 하면서 세상에 이런 내용을 알렸습니다. 이 책은 주로 박 기자가 썼는데 중간중간 박준영 변호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삼례 사건에 대한 박 변호사의 이야기를 읽겠습니다.


"가짜 살인범을 만들고, 자백한 진범을 풀어 준 과정에 수많은 공권력이 관여되어 있다. 이 사건은 대법원 판단도 두 차례나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에 관여한 경찰, 검사, 판사 그리고 국선변호인까지 어느 누구도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 있다. 진범보다 못한 공권력들이다."


"지금 피해자들은 용서를 빌러 오는 공권력을 기다리고 있다. 부둥켜안고 통곡할 준비가 되어 있다."


 다음 사건은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취재했던 SBS 이대욱 기자, 저랑 같이 입사한 동기입니다만, 이 기자의 얘기도 나옵니다. '팩트라마'라는 이름으로 팟캐스트에 업로드하기도 했죠.


 2000년 8월 10일 새벽, 전북 익산 약촌오거리에서 택시에 타고 강도짓을 하려던 한 남성이 기사를 살해하고 달아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근처를 배달오토바이를 타고 지나던 15살 소년이 '수상한 사람을 봤냐'는 경찰 질문에 뛰어가는 2명을 봤다고 진술했는데 이 소년이 범인으로 체포된 사건이 약촌오거리 사건입니다. 소년은 10년을 복역하고 2010년에야 출소할 수 있었습니다. 15살 홍안의 소년이 25살 청년이 됐습니다. 그 사이 진범이 따로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다른 경찰이 수사를 하기도 했지만 좌절됩니다. 


 가장 최근이자 더더욱 어려웠던 완도 무기수 김신혜 사건이 다음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은 여러분이 읽으실 몫으로 남겨놓겠습니다. 김신혜 사건은 1심에서 재심을 개시했지만 검찰이 항고해 다시 고등법원에서 재심 개시 여부를 판단하는 중입니다. 곧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이 책에서는 사건에 대해 쭈욱 서술하다가 사건 3부작에 대해 정리하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자기가 하지도 않은 죄를 인정하는 것은 '자기 파괴적인 행동'이다. 이런 행동을 합리적인 잣대로 이해하고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남을 이해하는 것은, 가정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온전히 자신의 상황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이들과 같은 상황에 처해본 적이 없다.... 어려운 상황과 조건에서 허위 자백을 했던 이들은 이렇게 세상의 상식과도 싸워야 한다. '상식적으로, 어떻게 허위로 사람을 죽였다고 말할 수 있느냐', '3심 제도와 국선변호인 제도가 있는데 왜 호소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이 그것이다."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수사기관은 그만큼 확신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도 크다. 이 함정에 빠지면 합법적인 유죄 입증이라는 어려운 길 대신, 의심과 조작이라는 쉬운 길로 빠지게 된다. 그리고 미성년자, 지적장애인, 가난한 사람 등 사회적 약자들은 이 길에서 더 쉽게 버려지곤 한다."


"우리는 이들이 겪는 인권유린과 부당한 대우에 문제의식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니 그런 대우를 받을 수도 있지.'라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수사기관, 법원만 사회적 약자에게 냉정했던 건 아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냉정하게 그들을 차별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다음 스토리펀딩 기획,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파산 변호사'라는 제목으로 진행했던 기획물을 모은 것입니다. 후원금 5억 6790만원이 모였고 시민 1만 7천여명이 동참했다고 합니다. 후원금, 후원자수 모두 다음 스토리펀딩 사상 최고 기록이라고 합니다. '지연된 정의'... 소설을 더 편하게 들으시는 듯하고 저도 읽기 재밌고 하지만.. 이 책은 소설이 아닙니다. 소설보다도 더욱 소설 같은 논픽션입니다. 


(출판사 후마니타스로부터 낭독 허락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