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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일기/북적북적

북적북적73/내 옆의 그 '지영'...'82년생 김지영'



북적북적73 '82년생 김지영' 듣기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김지영 씨는 우리 나이로 서른네 살이다. 3년 전 결혼해 지난해에 딸을 낳았다. 세 살 많은 남편 정대현 씨, 딸 정지원 양과 서울 변두리의 한 대단지 아파트 24평형에 전세로 거주한다. 정대현 씨는 IT 계열의 중견 기업에 다니고 김지영 씨는 작은 홍보대행사에 다니다 출산과 동시에 퇴사했다."


 82년생 김지영 씨. 이름만 보면 그리 특이한 인물이 아닙니다. 제 지인 중에도 김지영을 비롯해 지영이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1982년에 태어난 이들 중에 가장 흔한 여성 이름이 지영이라고 합니다. 그런 얘기가 있는데 출처는 못 찾았습니다. 대법원에서 공개한 자료를 보면 1978년생 여성도 '지영'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70년대 말, 80년대 초 대체로 비슷하겠죠.


 공무원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위로 두 살 터울 언니, 아래로 다섯 살 적은 남동생이 있는 2녀 1남의 둘째인 김지영 씨 일대기, 오늘 읽는 소설 [82년생 김지영]입니다.


 소설은 2015년 가을 지영 씨가 34살이던 시점에서 시작했다가, 33년을 거슬러 올라가 그때부터는 시간 흐름에 따라 지영 씨 삶의 궤적을 보여줍니다. 지영 씨 스스로 가장 어렸을 때 기억이라고 하는, 남동생 분유 가루를 먹던 장면부터 읽겠습니다.


"...함께 살던 할머니 고순분 여사는 김지영 씨가 남동생 분유를 먹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분유를 얻어먹다 할머니께 들키기라도 하면 김지영 씨는 입과 코로 가루가 다 튀어나오도록 등짝을 맞았다...


'감히' 귀한 내 손자 것에 욕심을 내? 하는 느낌이었다. 남동생과 남동생의 몫은 소중하고 귀해서 아무나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고, 김지영 씨는 그 '아무'보다도 못한 존재인 듯했다."


 남성인 저는 수혜자였겠으나, 굉장히 익숙한, 흔해 보이는 에피소드입니다. 그만큼 다반사로 벌어져, 사건 같지도 않기 때문 아닐까 합니다. 어머니인 오미숙 씨의 내력도 그렇습니다.


"...잠 깨는 약을 수시로 삼켜 가며 누런 얼굴로 밤낮없이 일해서 받는 터무니없이 적은 돈은 대부분 오빠나 남동생들의 학비로 쓰였다. 아들이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고, 그게 가족 모두의 성공과 행복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딸들은 기꺼이 남자 형제들을 뒷바라지했다....


그 자랑스러운 오빠들이 경제력을 갖게 되자 막내 외삼촌을 뒷바라지했다... 그제야 어머니와 이모는 사랑하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는 자신들에게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김지영 씨의 어머니가 된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치맛자락 끝을 꾹 밟고 선 작지만 묵직하고 굳건한 돌덩이. 김지영 씨는 그런 돌덩이가 된 기분이었고 왠지 슬펐다. 어머니는 김지영 씨의 마음을 알아채고는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딸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다정하게 넘겨주었다."


 학교에 간 김지영 씨, 학창 시절에 겪는 일들 역시 어디서 들어보거나 주변에서 겪어본 듯한 것들입니다. 꼭 제 또래라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 학교 주변에 출몰하던 일명 '바바리맨 소동'은 웃기면서도 슬픈, '웃픈' 사례입니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뒤 학원을 다니며 겪은 무섭고도 슬펐던, '뭇픈' 사례도 이어서 읽겠습니다.


"학교 앞에는 유명한 바바리맨이 있었다. 수년째 일정 시간, 일정 장소에 출몰해 온 토박이 바바리맨이었다. 이른 등굣길에 짠, 하고 나타나 어린 학생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기도 했고...


어느 이른 아침 골목에서 일진은 바바리맨과 마주쳤고, 그때 일진 뒤에 숨어 있던 넷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준비한 빨랫줄과 허리띠로 바바리맨을 묶어 근처 파출소로 끌고 갔다고 한다... 아무튼 이후로 바바리맨은 나타나지 않았고 다섯 명은 근신 처분을 받았다...


가끔 선생님들이 지나가며 그 아이들의 머리를 꽁 쥐어박았다. "여자애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학교 망신이다, 망신." 일진은 선생님이 지나간 후 낮게 씨발, 하고는 창밖으로 침을 뱉었다."



"...제발 따라오지 마라, 따라오지 마라, 따라오지 마라. 김지영 씨는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아무도 없는 정류장에 발을 내디뎠는데, 남학생도 뒤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외진 정류장에는 행인 한 명 지나가지 않았고, 가로등마저 고장 나 주위가 유독 깜깜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은 김지영 씨....


김지영 씨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을 때, 아버지가 헐레벌떡 골목에서 뛰어나왔다.... 하지만 김지영 씨는 그날 아버지에게 무척 많이 혼났다. 왜 그렇게 멀리 학원을 다니느냐, 왜 아무 하고나 말 섞고 다니느냐, 왜 치마는 그렇게 짧냐..."


 김지영 씨에게 도움을 줬던 여자분이 '그래도 세상엔 좋은 남자가 더 많다'라고 말해준 게 어린 지영 씨에겐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좋은 남자가 많긴 하겠지만, 더 많을까요. 아니 좋은 남자들이 항상, 모든 면에서 좋을까요.


 여러 곡절을 겪으면서 대학에 간 김지영 씨는 등산 동아리 활동을 하다 남자 친구를 사귀고 헤어집니다. 만남과 이별이야 일상다반사죠. 그러면서도 동아리 활동은 꾸준히 했는데 다른 이유로 결국은 그만두게 됩니다.


"... 예전부터 김지영한테 관심 있지 않았느냐, 관심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잘해 봐라, 우리가 도와주겠다, 하는 여러 목소리들이 계속 들렸다. 처음에는 꿈인가 했는데 곧 정신이 들면서 방 안에 있는 무리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밖에서 술을 마시던 복학생 선배들이었다.


... 이제 잠도 완전히 깼고 좀 덥기도 했는데 본인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불을 걷고 나갈 수가 없었다. 본의 아니게 민망한 대화를 엿듣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말했다.


아, 됐어. 씹다 버린 껌을 누가 씹냐?


... 일상에서 대체로 합리적이고 멀쩡한 태도를 유지하는 남자도, 심지어 자신이 호감을 가지고 있던 여성에 대해서도, 저렇게 막말을 하는구나. 나는, 씹다 버린 껌이구나."


 김지영 씨는 졸업을 앞두고 본격 취업에 도전합니다. 청송 여송 문송입니다... 청년이라 죄송, 여성이라 죄송, 인문계라 죄송... 취업하기 힘든 3박자를 갖췄습니다. 스카이도 아닌 인문계 여학생으로서, 서류심사도 한 번 통과하지 못하다가 간신히 한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는데.. 면접장 가는 길부터 순탄치 않습니다. 정작 사건은... 이 사건 역시 평범하다면 평범합니다만.. 들어보시죠.


"...마지막으로 가장 끝자리에 말없이 앉아 고개만 끄덕이던 중년의 남자 이사가 물었다.


거래처 상사가 자꾸 좀, 그런, 신체 접촉을 하는 겁니다. 괜히 어깨도 주물주물하고, 허벅지도 슬쩍슬쩍 만지고, 엉? 그런 거? 알죠?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 마지막 면접자가 대답했다.


"제 옷차림이나 태도에 문제는 없었는지 돌아보고, 상사분의 적절치 못한 행동을 유발한 부분이 있다면 고치겠습니다."


...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김지영 씨도 씁쓸했는데, 한편으로는 저런 대답이 높은 점수를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 후회했고, 그런 자신이 한심했다.... 그 이후에도 숱하게 면접을 보았고, 종종 외모에 대한 지적이나 옷차림에 대한 저속한 농담을 들었고, 특정 신체 부위를 향한 음흉한 시선,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겪기도 했다. 취직은 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숱한 좌절을 맛본 끝에 김지영 씨는 한 홍보대행사에 합격했습니다. 정말 운이 좋게도 회사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았고 멘토로 삼을 만한 여성 팀장도 있었으며 나름대로 지영 씨는 첫 사회생활을 잘 해내고 있었습니다.  외부 고객들의 크고 작은 '갑질'들이 있었지만, 갑질 없는 곳이 어딨겠냐 생각하면 견딜만한 수준이었습니다. 정작 더 크게 다가온 건 내부의 '유리 천장'이었습니다.


"... 김지영 씨의 남자 동기 두 사람이 기획팀으로 옮겨 갔다. 사내에는 기획팀이 마치 핵심 인력 부서인 듯한 분위기가 형성됐는데, 박탈감이 상당했다. 그동안 여자 동기들 평판은 더 좋았다. 선배들은 남자 둘은 왜 저렇게 처지느냐고 공공연하게 농담을 하곤 했다....


대표는 업무 강도와 특성상 일과 결혼 생활, 특히 육아를 병행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여직원들을 오래갈 동료로 여기지 않는다... 그동안 김지영 씨와 강혜수 씨에게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를 맡긴 것도... 오래 남아할 일이 많은 남자들에게 굳이 힘들고 진 빠지는 일을 시키지 않은 것이다."


 서른한 살 김지영 씨는 결혼합니다. 회사는 물론 계속 다닙니다. 경사, '좋은 소식'입니다. 결혼이라는 '좋은 소식'이 지나가면 다음 '좋은 소식', 저도 무수히 들어왔습니다만, 그걸 기다리고 따져 묻는 분들이 많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우리 주변의 오지라퍼들.


"... 어른들은 김지영 씨의 대답과는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으로 확신하고 그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나이가 많아서, 몸이 너무 말라서, 손이 찬 걸 보니 혈액 순환이 안 돼서, 턱에 뾰루지가 난 걸 보니 자궁이 좋지 않아서... 김지영 씨는 충분히 건강하다고, 약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가족계획은 처음 보는 친척들이 아니라 남편과 둘이 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니에요, 괜찮아요, 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빠가 잃는 건 뭔데?

응?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라며. 나는 지금의 젊음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지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 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

...

"그렇겠네. 오빠도 힘들겠다. 근데 나 오빠가 돈 벌어 오라고 해서 회사 다니는 건 아니야. 재밌고 좋아서 다녀. 일도, 돈 버는 것도."


 임신, 출산에 육아 과정을 거치면서 인생의 중대한 결정, 특히 여성에게는 더욱 큰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 파도처럼 계속 순식간에 밀려옵니다. 결정의 순간, 다른 많은 이들처럼 끝내 그렇게 결정하는 대목입니다.


".. 결국 부부 중 한 사람이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보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그 한 사람은 당연히 김지영 씨였다. 정대현 씨의 직장이 더 안정적이고 수입이 많기도 하고, 그런 모든 이유를 떠나 남편이 일하고 아내가 아이를 키우며 살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기도 때문이다....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퇴사 이후 아이를 낳고 키우는 사이 이전 다니던 회사가 발칵 뒤집어지는 사건이 터집니다. 결국은 회사가 쪼개지고야 마는, 새누리당 분당 사태에 버금가는 사건인데.. 이것도 따져보면 흔하다면 흔히 볼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할까요.


 암튼... 김지영 씨는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가 어린이집에 적응 잘하는 것 같자 뭔가 해보고 싶었지만 마땅한 일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던 차에 충격적인 얘기를 듣습니다. 어째서 평범하기만 한 김지영 씨의 인생이 이렇게 충격의 연속일까요.


 이후 김지영 씨에게는 어떤 증상이 생깁니다. 이를 치료 혹은 치유하기 위한 과정이 진행되죠. 사실 소설은 김지영 씨에게 그 증상이 생긴 때부터 시작해, 인생사를 시간순으로 훑으면서 2016년까지 오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저는 좀 바꿔서 읽었습니다.


 처음부터 들으셨다면 느끼셨겠으나, 저는 김지영 씨 이야기를 읽으면서 익숙하다거나, 평범하다, 흔하다, 그런 표현을 많이 썼습니다. 그러면서도 충격, 상처, 고난이라는 표현도 동시에 사용했습니다. 평범해서 오히려 비범한, 이 비범하다는 게 좋은 의미는 아닙니다, 이런 인생과 삶이 도처에서 쉽게 접할 수 있을 정도라는 게 현실이고 그게 문제 아닐까요.


 쉽게 읽히고 너무나 뻔하고 흔한 에피소드만 나오는 [82년생 김지영]은 그만큼 평범한 여성이 평범하게 사는 것도 쉽지 않다는 걸 역설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 짧은 소설 안에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다시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차별과 편견으로 인한 상처, 성폭력과 추행의 위험성, 임신 출산 육아의 괴로움, 직장 내 유리천장, 경력 단절 문제, 여성 혐오까지 담아냈습니다.


조남주 작가는 엄마를 맘충이라고 지칭하는 세태에 충격을 받아 이 소설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저도 작년 '맘충'이란 말을 처음 접하고 약간 공황 상태에 빠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출판사 민음사에서 낭독 허가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