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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일기/북적북적

북적북적72/대리 대통령 낳은 '대리사회'


북적북적72 '대리사회' 듣기


"우리는 더 이상 온전한 나로서 현상을 바라보고 사유하지 않는다. 스스로 판단하고 질문하는 법을 점차 잊어가고 있다. 대리사회의 괴물은 그러한 통제에 익숙해진 대리인간을 원한다."


 2016년 12월 19일은 지금 청와대에 본의 아니게 칩거하게 된 그분이 당선된지 4주년인 날입니다. 그분이 대통령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공동 정권' 혹은 '대리 대통령'이었다는 비판과 한숨도 지겨울 정도로 많이 나왔죠. 그런데 말입니다. 이 '대리'라는 거, 그분 말고 우리는 '대리'라는 말에서 자유로울까요. 


지난주 읽은 '편의점 인간'에서는 매뉴얼대로, 정해진 틀에 맞게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사회의 단면을 봤는데, 이번 책에서는 맨 위의 문장에 나왔듯, 통제받는 대리인간을 원하는 '대리사회'를 살펴봅니다. 김민섭 작가가 쓴 '대리사회'입니다.(출판사 미래엔으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김민섭 작가는 2014년과 2015년 일명 '지방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연재하고 책까지 펴낸 바 있습니다. 책 제목대로 지방대 시간강사 신분이었다가 대학을 박차고 나온 뒤 생계를 위해 대리기사 일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들여다본 대리기사의 세계, 그리고 이 한국사회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낭독1)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다. 은밀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대리사회의 괴물'은 그 누구도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행동하고, 발화하고, 사유하지 못하게 한다. 모두를 자신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대리인간'으로 만들어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힌다. 자신의 차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운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틀을 만들고, 스스로 사유해야 한다. 끊임없이 불편해하고, 의심하고, 질문해야 한다."


대리기사로서 타인의 운전석에 늘 앉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어느 대화에든 주체로서 참여하기 힘들다, 저자의 경험에서 우려난 설명입니다. 이 타인의 운전석은 곧 '을의 공간'.. 도처에 넘쳐나는 '을의 공간'은 '순응하는 몸'을 만들게 됩니다. 대리사회는 대리인간을, 대리인간은 대리국민을 양산하는 식입니다.


(낭독2)

"국가 시스템에 효율적으로 통제되면서도 자신을 주체로 믿는, 동시에 사유하지 않고 모든 현상을 바라보는 국민은 지금의 국민국가가 지향하는 '대리사회'의 이상향이다. 그렇게 '대리국민'이 된 이들은 국가를 위한 싸움에 스스로 나선다.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국가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자신들의 국가'를 위해, 그에 순응하지 않는 이들과 몸소 싸워나간다." 


이 책에는 대리기사가 아니면 겪을 수 없는 에피소드들이 곳곳에 나옵니다. 대다수가 을로 살아가지만 자신이 갑이 되는 순간에는 서슴지 않고 갑질하는 잔인함도 목격합니다. 나도 이런 적이 있지 않았을까, 혹은 상황은 다르더라도 은연중에 그랬을 수 있다는 생각에 섬찟하기도 했습니다. 대리기사의 에피소드를 통해 본 일상의 갑질에 대한 내용입니다.


(낭독3)

"일산으로 가는 손님은 가는 내내 방귀를 뀌었다. 창문을 열고 싶었지만... 묵묵히 숨을 얕게 쉬면서 운전했다. 자유로에서만 네 번은 방귀를 뀌었나 보다. 그때마다 민망해하면서도 창문은 절대 열지 않았다. 대리기사라지만 방귀 냄새까지 다 맡아주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나에게는 창문을 열 자유가 없었다."


"두 개 이상의 대리운전 회사에 전화를 하고 먼저 오는 기사와 함께 가는 손님들이 있다. 내가 먼저 도착하든, 늦게 도착하든, 몹시 화가 났다. "아이고, 아저씨가 먼저 오셨네, 갑시다" 하는 그들에게 "그러지 마세요. 당신 때문에 누군가는 여기로 뛰어오고 있어요" 하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았고, 결국 나는 언제나 목적지까지 그들을 태워다 주었다."


"양쪽에서 전화를 받아 누가누가 먼저 오나 경주를 시키기도 하고, 자신의 요구에 따라 거리를 내달려 온 이들을 취소 문자 하나로 돌려세우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 일상의 '갑질'이다. 당하는 이들에게는 대리가 아닌 주체의 아픔으로 오래 남는다. 대리라는 직함을 달고 있다고 해서 감정까지 대리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합니다. 나도 대리기사나 할까. 운전면허가 있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로 여겨지니 그럴 것입니다. 실제로 그럴 것이, 대리기사의 노동은 대체로 진입장벽이 낮을테니까요. 그런데 제가 하고 있는 노동과, 대리기사의 노동이 본질적으로 다른 걸까요. '대리 노동'에 대한 내용입니다.


(낭독4)

"기업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노동자의 주체성을 농락한다... 인턴이라는 정체불명의 직함을 부여하고서는 무임금으로 사람을 부리고, 언제든지 해고하고, 기본적인 사회적 안전망조차 보장하지 않아도, 기업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에 더해 국가/정부는 기업을 위한 법안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간다. 결국 노동자는 노동 현장의 주체가 아닌 대리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회사의/매장의/학교의 주인처럼 일하라'는 수사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이것은 정말이지 파렴치한 역설이다. 노동자의 주체성을 강탈하는 동시에 그 빈자리에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것이다....어쩌면 '열정 착취'보다도 한 단계 진화한 방식이다. 노력뿐 아니라 행복과 만족까지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영혼 착취'라고 규정하고 싶다."


"우리 시대의 노동은 '대리노동'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의 주체이면서, 또한 주체가 아니다. 대리운전뿐만 아니라 대학에서도, 동네 마트에서도, 장례식장에서도, 그 어느 노동의 공간에서도, 우리는 노동자가 아닌 '대리인간'으로서만 존재한다. 지금 이 사회에서 타인의 운전석보다 나은 공간이 얼마나 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요정이 아니라 인간인 노동자들, 노동의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낭독5)

"어느 외국인은 "한국에는 요정이 산다"라고 했다. 술에 취하면 대신 운전해 집까지 데려다주는 요정이 있다는 것이다. ...대리운전은 정말이지 요정이 다녀간 것과 같은 노동이다.... 사실 노동의 본질은 '대리'다. 우리는 스스로 하기 어렵거나 귀찮은 일을 타인에게 대가를 주고 대신하게 한다. 하지만 과정의 수고로움은 잘 드러나지 않고 결과만이 남는다는 점에서 노동 그 자체는 대개 은폐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노동하는 모두는 누군가에게는 요정이다."


"거리에는 여기저기에 숨어 있던 요정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막차가 끊긴 시간부터 첫차가 다니기 이전까지만 눈에 보인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자신의 노동을 시작하는 이들이 이처럼 존재한다. 그런데 그것은 대개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노동이다... 그들은 놀랄 만큼 많고, 또 다양하다... 그러나 그들은 요정이 아닌 '노동자'다."


"어느덧 우리의 신체는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투명해졌다. 모두가 대리인간이 되어간다. 은폐된 노동을 기억하고 상상하는 일은, 결국 점점 지워져 가는 우리의 신체를 되찾는 일이다. 나는 노동하는 한 인간으로서 밤을 걷는다. 이 거리에, 노동자가 있다."


때로는 현학적인 글들이 필요하겠으나 저 자신도 학문이 짧고 하다보니 이렇게 쉬운 말로 쓴 글들이 좋습니다. 어쩌면 뛰어난 통찰과 그를 뒷받침하는 경험과 연구들이 있다면 이를 읽기 쉽게 풀어쓰는 글이 더 좋은 글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원래 저널리즘의 글쓰기가 그런 것이기도 하겠요. 이 책의 글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추천사는 홍세화 선생과 장강명 작가가 썼습니다. 특히 홍세화 선생은 20여년 전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출간했었는데 김민섭 작가는 '나는 한국의 대리운전사' 격인 책을 냈습니다. 택시운전과 대리운전을 통해 그 사회의 본질을 성찰하는 면에서도 두 책은 닮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