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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일기/북적북적

북적북적74/아무러한 새해를 바라며..'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북적북적74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듣기



"짧은 글 우습다고 쉽사리 덤볐다가

편두통 위장장애 골고루 앓았다네

짧았던 사랑일수록 치열하게 다뤘거늘"


 2017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실감 안 납니다. 설마 그렇겠어 싶은 것들 상당수가 그렇거나 그럴 것으로 확인되는 이상한 시간이 이어지고 있어서 그런가 싶습니다.  웬만해선 놀라지도 않고 웬만해선 화나지도 않고.. '웬만'의 기준이 굉장히 높아졌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는 건 냉소와 혐오... 또 뭐가 있을까요. 하나 더 꼽으라면 슬픔을 꼽겠습니다.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은 현실과 시민들의 심정을 제목으로 삼은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가 오늘 읽을 소설집의 제목입니다.


250쪽 책에 담긴 소설이 무려 40편입니다. 중간중간 삽화도 있고 빈 페이지도 있으니 소설 한 편이 4-5페이지 분량입니다. 굉장히 짧은 소설, 학창 시절 기억을 떠올려보면 콩트라고 할까요, 나뭇잎에 썼다는 엽편 혹은 손바닥에 썼다는 장편 소설일까요. 신문에 연재했던 짧은 소설을 모아 냈으니 이렇습니다. 짧은 만큼 여기서 끝내기엔 아쉬운데.. 싶은 것들도, 비록 짧아도 제법 완결성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이 소설집의 표지에는 눈 덮인 산이 그려져 있습니다. 정상은 구름으로 쌓여 있는데 아파트 같은 건물이 삐죽 나와 있습니다. 왼쪽 아래를 보면 빨간 모자와 티셔츠를 입은 누군가가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손에는 봉지를 하나 들고 있고요. 무슨 의미일까요. 표지그림 소설인 '아파트먼트 셰르파'를 먼저 읽겠습니다. 셰르파는 히말라야 등산을 돕는 현지인들을 가리키죠.



"이번엔 17층이었다. 한 층에 계단이 열아홉 개씩 있으니까 17층이면 삼백이십 개가 넘는 계단이었다. 이제 진짜 이놈의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때가 된 것 같다. 오늘까지만, 오늘까지만..... 그런 생각으로 나는 가게 문을 나섰다. 오늘만 벌써 아홉 번째 배달이었다. 다리가 저절로 후들거렸다."


"글쎄요. 아파트에 사니까 아파트만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기억하실 겁니다. 어느 강남의 아파트에서 배달원들에게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 내용의 전단을 붙이면서 볼썽사나운 화제가 됐던 일이 있죠. 


저도 17년째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만, 아파트 거주민이 전 국민의 절반에 이르다 보니 아파트 에피소드나 이슈가 참 많습니다. 또 다른 아파트 이슈인 층간 소음을 소재로 한 소설, '한밤의 뜀박질'입니다.


"닷새에 한 번, 혹은 일주일에 한 번꼴로 우다다다 마치 쥐 떼가 단체로 러닝머신 위에 올라타기라도 한 듯 위층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들은 어느 땐 십 분 넘게 지속되었고, 또 어느 땐 이십 분 이상 계속되기도 했다."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1302호 남자의 아들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밝은 표정이었다. 민수는 말없이 그 아이의 표정을 따라 지으며 자신의 딸 또한 저런 표정으로 자라나길 속으로 바라보았다."


새벽 3시가 넘은 시각,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의 졸음쉼터, 

정차해 있는 차량, 

그리고 또 다른 트럭 하나,

투명테이프, 화덕, 번개탄, 소주,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미드나잇 하이웨이'입니다.


"아이 씨, 정말.... 생각 같아선 그냥 삼만 원을 주고 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지갑엔 만 육천 원이 전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죽은 후 화덕 옆에 간고등어가 놓여 있는 게 발견된다면.... 사람들은 과연 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저기 그러지 마시고요, 선생님. 여기 벤치에 앉아서 저하고 같이 고등어나 한 마리 구워 드시죠. 어차피 라이터도 저 주셔서 번개탄 붙이기도 어려울 텐데... 뭐, 그냥 허기나 채우자고요. 별도 좋은데."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빚 투성이 공장 운영이 잘 안돼서 사채까지 끌어 쓰고 아내는 떠났고 절망만 남은 이 남자는 자살을 선택했는데... 우연인지 아닌지 차 옆에 정차한 트럭 운전자가 역시 우연인지 아닌지 방해합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진 이 남자, 이다음은 어떻게 전개될까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단편을 쓰고는 이후 뒷이야기를 이어가 장편 소설화하는 식으로도 노르웨이의 숲, 태엽 감는 새 등 여러 편의 대작을 남겼습니다. 이 콩트들도 이후 더 무르익거나 영글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엔 저도 자주 들르는 광화문 대형 서점에서 벌어진 책에 관한 소설, '마주 잡은 두 손'입니다.


"그녀는 생애 최초로 책을 훔치기로 마음먹었다네. 가슴은 떨렸지만, 어쩌나. 그 책을 가져야만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았다네.... 저 문만 나가면, 저 문만 나가면, 그녀는 이를 앙다문 채 그렇게 속엣말을 했다네. 그리고 막 출입문을 나서려던 찰나, 누군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네."


"그녀를 향해 뛰어갔다네. 머릿속은 계속 아득해져 갔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네. 그리고 다짜고짜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출입문을 밀치고 뛰어나갔다네. 어쩐지 자신이 원고지가 아닌 삶 속에서 소설을 쓰고 있는 기분이었다네."


'웬만'의 기준이 굉장히 높아져 냉소와 혐오를 부른다... 고 앞머리에 말했습니다만, 어쩌면 신기하게도 이기호 작가의 소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게- 물론 제가 몇 권 읽지 않았습니다만...- 냉소 같습니다. 해학이 있고 풍자는 있으나 냉소와는 거리가 있다고 느낍니다.

 

'웃는 신부'와 '우리에겐 일 년 누군가에겐 칠 년'을 이어서 읽겠습니다.


"신부의 어머니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며 사위와 딸에게 인사를 받으려는 찰나, 신부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예의 또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니, 뭐 저런 신부가 다 있담. 나는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여기저기 하객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런데도 신부의 터진 웃음은 멈추질 않고..."


"사람한테 일 년이 강아지한텐 칠 년이라고 하더라. 봉순이는 칠 년도 넘게 아픈 몸으로 내 옆을 지켜준 거야. 내 양말을 제 몸으로 데워주면서."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은 우리의 삶. 아무렇다.. 고 하면서 좀 못난 사람, 감정적이고 감상적이고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는 사람 같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 그런 상황, 새해에는 좀 적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소설집에 실린 40편의 콩트 소설 중에는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는 제목의 콩트는 없습니다.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를 담은 제목이라고나 할까요. 소설집 제목이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입니다. 


(출판사 마음산책에서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