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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유명무실 '국어책임관'.. 국어는 누가 책임지나

기사 보기-> 뜻모를 공문서..법도 안 지키는 정부






국어책임관


'국어책임관'이라는 자리가 있다. 해당 기관에서 국어의 발전과 보전을 위한 업무를 총괄하는 역할을 한다. 국어기본법에서는 "지정할 수 있다"고 했지만 시행령에서는 "지정해야 한다"고 더 강하게 규정하고 있다.

 

국어책임관의 임무는 아래와 같다. 역시 시행령에 나와 있다.

 

1. 해당 기관이 수행하는 정책을 효과적으로 국민에게 알리기 위한 알기 쉬운 용어의 개발과 보급 및 정확한 문장의 사용 장려

2. 해당 기관의 정책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국어 사용 환경 개선 시책의 수립과 추진

3. 해당 기관 직원의 국어능력 향상을 위한 시책의 수립과 추진

4. 기관 간 국어와 관련된 업무의 협조

 

현재 중앙행정기관에 43명 등 정부 부처와 지자체를 포함해 모두 508명이 활동 중이라는 게 문화체육관광부의 공식 설명이다. 홍보 담당 부서장이나 그에 준하는 직위의 공무원을 국어책임관으로 지정한다.

 


할일 많은데 본업은 따로? 


저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정책 홍보를 위한 알기 쉬운 용어도 개발하고 보급하고 국어 사용 환경도 개선할 시책을 마련하고 추진해야 하며, 직원들 국어능력 향상에도 힘써야 한다. 정책 홍보를 위해 작성해 배포하는 보도자료만 해도 하루에 여러 건인데 정확한 한국어로 작성됐는지도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국어책임관은 이 일만 하지 않는다. 사실은 본업이 따로 있다. 홍보 담당이거나 그에 준하는 업무를 하고 있는데 당연직으로 국어책임관을 겸임한다. 어느 기관이나 그렇다. 

 

모 기관의 홍보 담당 직원은 국어책임관이 누구냐고 묻자, "국어책임관이 뭔가요?" 하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냥 직원도 아니고 홍보 담당 업무를 하는데도 그랬다. 존재감이 없는 거다. 거의 역할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국어책임관을 겸임하고 있는 어느 부의 담당관은 이렇게 말했다.


"국어책임관이 지위가 좀 애매하죠. 저도 사실 공식 업무가 아니라 겸임을 하는 상황이라... 부내 교육이나 홍보도 많이 필요한 사안인데 겸임해서 하기엔 한계가 있어요."


또 국어책임관의 지위는 대개 과장급이다. 기관 전체의 국어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인데 직급이 낮다. 그 위에 국장, 본부장, 실장 등이 즐비한데... 겸임에다 낮은 직급, 그리고 낮은 관심, 정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법 안 지키는 정부


한글날을 맞아 한글문화연대가 2012년에 이어 또 정부의 공문서 오염 실태에 대해 발표했다.


2013년 4월부터 6월까지 석 달 동안 17개 정부 부처와 국회, 대법원에서 낸 보도자료 3,068건을 분석했더니 국어기본법을 위반한 사례가 8,842회로 나타나 1건당 평균 2.88회 위반했다는 내용이다. 2012년엔 보도자료 2,947건 분석, 13,099회 위반으로 1건 평균 4.4회였다. 2012년보단 줄었지만 여전히 많다.




국어기본법 14조에서는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만 시행령에서 신조어나 이해를 위해 필요한 경우 괄호 안에 한자나 외국 글자를 쓸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엄연한 법 위반이다.





기관별로는 산업통상자원부가 보도자료 1건당 12.4회로 1위, 미래창조과학부  5.8회 2위, 외교부 4.4회 3위, 기재부 4.2회 4위를 기록했다. 


이에 대해 해당 부에서는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지만 신조어나 전문용어, 신기술 관련 용어 등은 아직 대체할 말도 없는 상황이라 현실적으로 다 지킬 수 없다고 해명했다. 또 사실상 한글화된 외국어에 대해, 이를테면 FTA 같은 걸 굳이 '자유무역협정(FTA)'라고 적는 건 시대 추세에 안 맞는 것 아니냐고 항변하기도 했다.



해명과 항변에 일리는 있지만...


일리 있는 해명과 항변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 “산업융합은 우리 경제가 Fast Follower에서 First Mover로 도약할 수 있는 핵심 경제의 전략으로, 주력 산업의 성장 모멘텀을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성장 DNA임을 강조함”(산업자원부 5.14) 

- “중대사건은 긴급사건과 마찬가지로 Fast Track으로 처리할 계획임”(법무부 4.18)

- “철도시장 특성을 감안하여 Killer Item 개발부터 시험·검증, 상용화까지 패키지 지원전략도 마련한다.”(국토교통부 4.7)

- “나눔 문화를 확산하는 계기가 되고자 ‘어린T를 벗자’는 기부행사를 마련해”(여성가족부 5.16)


<한글문화연대 보도자료 중에서...>



이런 식의 표현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상황에서, 저 해명과 항변은 변명처럼 들린다.


한편으로 현재 어문규범에도 문제는 있다. 위에 나온 표현 중에 Fast Follower를 '패스트 팔로워'라고 적는다면 외래어 표기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해하기 어렵기는 매한가지인데 말이다. 한글날 즈음이면 반복되는 이런 질타에 각 기관이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만 보도자료를 작성할 가능성이 있다. '가이드라인', '리스크', '시너지' 등은 '기준, 지침' '위험' '상승효과' 등으로 바꿔 쓸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 게 대표적인 예다. 국민에게 정책을 알기 쉬운 말로 널리 알리자는 보도자료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점에선 법을 어기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다. 내년 한글날엔 이런 예를 모아 "정부 공문서 그래도 여전히 외국어로 오염" 어쩌고 기사쓸 수도 있겠다만.



국어전문관 충원이 대책?


여러 차례 이런 지적을 받자 국어정책을 담당하는 문화체육관광부는 각 기관에서 국어책임관을 보좌하는 국어전문관을 둘 수 있게 국어기본법을 개정하겠다고 대책을 내놨다. 국어전문관은 국어전문가다. 국어책임관을 보좌한다고 하니 그 아래 직급일 것 같은데 현재의 국어책임관도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국어전문가 한 명이 추가된다고 하여 얼마나 달라질지 회의적이다. 국어전문가 집단인 국립국어원에서 개선하라는 권고도 그저 무시해버리는 게 이제까지 각 기관의 행태였다.(관련 기사 보기=> "뭐라는 거야?" 뜻모를 공문서)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공무원 개인이나 문화부 같은 일개 부 차원이 아니라 정부 전체 차원에서 국어정책을 총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처럼 하다 보면은 한국어는 하류어가 돼 버리고 영어는 고급언어, 상류언어, 지식과 기술, 과학을 표현하는 그런 언어가 돼 버리니까 그러면 우리 말로는 지혜와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없게 돼 버리죠. 나중에는 한글도 설 자리가 없어지는 거죠.

 

세계화, 개방 이런 것 때문에 영어 능력이 중요하다,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까 영어 잘하는 사람이 뭔가 잘나 보이는 그런 느낌을 사람들이 다 갖게 된 거 같아요. 그게 악순환을 자꾸 주고 있는 거 같고. 학계와 산업계에서 영어 낱말을 자꾸 수입하다 보니까 공무원 사이에서도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생기게 되죠. 


지금 큰 문제는 우리가 그런 과학기술 관련된 전문 용어나 이런 것들을 우리말로 표준화하는 작업을 별로 열심히 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게 문제죠. 굉장히 많은 돈이 들어가는 일인데 그 일을 사실 해줘야만 우리말로 과학 기술과 지혜를 키워나갈 수 있는 자양분이 만들어 질 수 있거든요. 불가피한 말도 있지만 예를 들면 가이드라인이니 리스크니 이런 말들은 기준이나 지침, 위험 이런 말로 다 바꿀 수 있는 말인데 영어 낱말이 한국어 자리를 몰아내고 있는 거죠. 


이런 것은 국민과의 의사소통에서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공무원들이 핑계만 댈 것이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시민단체가 바꿀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국가 차원에서, 범정부적으로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어떤 별도의 조직이 필요한 거 같습니다. 


전체를 관리하는 한국어 위원회 이런 것을 대통령 직속 기구로 만들어서 실무적인 일은 문화체육관광부나 국립국어원이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총괄하고 마지막 결정을 내는 작업은 그런 곳에서 하면서 우리의 언어 정책을 세워나가는 일을 큰 안목을 가지고 해야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유행처럼 번지는 여러 가지 그런 외국어를 그냥 막 사용하는 것은 공무원들 스스로 자제해야 되고 우리말을 곱게 정확하게 쉽게 쓰는 게 훨씬 더 유능한 공무원이라는 인식을 국민이나 공무원 스스로도 가지셔야 될 거 같습니다.


쉬운 공공언어라는 건 국민이 정부의 정책 형성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문을 열어놓는 역할을 하거든요. 만약에 그 내용을 모른다면 국민이 그런 공간에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죠. 그렇기 때문에 쉬운 공공 언어를 사용하도록 노력을 해야 되고 또 그런 것이 어찌보면 국민들의 다양한 권리를 보장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쉬운 언어로 접근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마셨음 좋겠습니다."


내 생각도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