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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경찰청 언저리 생각

잘 나가던 검사장의 발목을 잡은 건...

-'공연음란' 키워드로 연합뉴스 검색을 해보니, 지난 6월부터 8월 14일까지 기사 6개가 있다.

 

6/2 <여성 속옷 차림 신체 노출 30대에 벌금 1천만원 선고> 

6/8 <술 취해 강남 일대 알몸 활보한 '전자발찌남' 검거>

6/29 <아파트 놀이터 '바바리맨' 검거>

6/30 <'바바리맨' 잡고 보니 스포츠 유망주>

7/14 <집행유예 '바바리맨' 항소심서 법정구속>

8/11 <천안 주택가 40대 '바바리맨' 현장서 붙잡혀>

 

6/29와 30 기사는 같은 사건에 대한 것. 6/2의 30대 남성에겐 벌금 천만 원이 선고됐는데 이는 수개월 동안 여러 차례 음란행위를 한 혐의가 인정됐기 때문인 듯하다. 7/14의 20대 '바바리맨'은 6개월 간 7차례 음란행위에다 2차례 벌금형 전력이 있어 1심에선 집행유예였지만 항소심에선 실형 선고를 받았다.



-형법 245조는 공연음란죄에 대한 처벌을 규정하고 있다. 공연음란(公然淫亂)은 공연히 음란한 행위를 하는 죄로 1년 이하의 징역, 500만원 이하의 벌금·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 

 

사건 따라 조금씩 달라지긴 하겠으나 대략 초범에다, 그저 몇 차례 음란행위를 한 것이라면 그간 판례로 보면 약식 재판으로 벌금형 정도, 정식 재판을 받더라도 집행유예를 받지 않을까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공연 음란' 죄는 아주 중대한 범죄는 아니라는 거다.


-그리고 8월 15일, 여기 기사 하나가 있다.


8/15 <제주 시내에 나타난 50대 '바바리맨'...현장서 붙잡혀>

 

 제주 동부경찰서는 

시내 음식점 앞에서

음란 행위를 한 혐의로

52살 김모씨를 붙잡아 조사하고 있습니다.

 

 김씨는

지난 12일 자정 무렵

제주시 중앙로의 한 식당 앞에서

은밀한 신체 부위를 노출해

음란 행위를 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경찰은 

"어떤 남성이 음란 행위를 하고 있다"는

112 신고를 받고 출동해

김씨를 현행범으로 체포했습니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다른 사람을 자신으로 오인한 것"이라며

범행을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김씨는, 짐작하다시피 김수창 전 제주지검장이다.


위 기사는 가상 기사, 실제는 이랬다.


김수창 제주지검장이

공공장소에서 음란행위를 한 혐의로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됐습니다.


김 지검장은 13일 새벽

제주시 중앙로의 한 음식점 앞에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됐습니다.


유치장에서 밤을 보낸 뒤

10시간 만에 풀려난 김 지검장은

경찰 조사에서

다른 사람을 오인한 것 아니냐며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습니다.


대검찰청은 감찰본부장을

제주로 급파해

사건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김수창 당시 제주지검장이 '공연음란' 혐의로 체포됐다 풀려났다는 사실이 알려진 건 지난 15일 저녁이다. 사건 발생은 8월 12일 자정 무렵이었다. 대검찰청에서 현지에 감찰본부장을 급파해 조사를 벌였고 김 지검장도 불러 조사했다. 

 

김 지검장은 이후 기자들과의 통화에서도, 대검 조사에서도, 일관되게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이 '다른 사람을 자신인 것으로 오인'해 체포됐으며 억울하다는 취지였다. 그리고는 8월 17일 일요일에 검찰 기자실을 직접 방문해 기자회견을 했다. 아래는 회견문 전문이다.

 

<기자회견문>

-저는 오늘 저의 검사생활을 통하여 가장 참담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22년의 검사생활 동안 검사로서 조그마한 흠집도 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난 8월12일 임지에서 황당하고 어이없는 봉변을 당했으나 검찰조직에 누가 될 것을 염려하여 제 인적사항과 신분을 감춘 것이 상상조차 못할 오해를 불러 일으켜 저와 저의 가족은 죽음과도 같은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오해 자체만으로도 저와 제가 몸담고 있는 검찰의 생명과도 같은 명예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굴욕을 맛보고 있습니다.

 

확인되지도 않는 터무니 없는 의심으로 한 공직자의 인격이 말살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평생 한이 될 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철저하고도 명백하게 진상이 밝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신속하고도 철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하는데 검사장으로서의 제 신분이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면 검사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자청하고 인사권자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부디 신속하고 철저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져 억울하게 실추된 저와 검찰의 명예가 회복되기를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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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장이 이렇게까지 말했다. 모두가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수사를 직접 했던 경찰도 당시 정황 등 여러 면으로 볼 때 확신을 갖고 있었다지만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불과 닷새 뒤 제주에서는 김 전 지검장(그 사이 사표 제출, 수리)의 변호인이 기자들 앞에 나왔다. 기자회견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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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창 전 검사장은 현재 몸과 마음이 극도로 쇠약해져 입원치료 중인 관계로 경찰수사결과 발표에 대한 김 전 검사장의 입장을 변호인이 대신 전달, 말슴 드리겠습니다.

 

김 전 검사장은 "이 건으로 충격과 크나큰 실망을 드린 점 깊이 사죄드리고 본인도 극도의 수치심으로 죽고 싶은 심정이나 가족들을 생각해 차마 그러지 못하고 있는 점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경찰수사 결과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의 사법절차도 성실히 따르겠습니다. 본인의 정신적 문제에 대해서도 전문가와 상의해 적극적으로 치유하도록 하겠습니다"라는 심경을 전달했습니다.

 

변호인은 김 전 검사장의 심신상태를 보아가며 앞으로 진행될 사법절차에 대처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닷새 만에 입장을 180도 바꾼 이유는, 물론 경찰 수사를 통해 김 전 지검장의 혐의가 확인됐기 때문이다. 경찰은 처음 음란 행위가 신고된 지점 주변을 샅샅이 뒤졌고 비교적 선명한 영상이 담긴 CCTV 8개를 확보했다. 김 전 지검장이 처음 연행됐던 지구대와 유치장 CCTV 2개를 함께 분석 의뢰해 국과수로부터 거의 같은 사람이란 걸 확인받았다. 국과수는 영상에 담긴 사람의 옷차림, 얼굴형, 신체 특징, 걸음걸이까지 분석했다. 김 전 지검장이 "다른 사람을 자신으로 오인한 것 같다"던 다른 사람은 그 시간대 그 주변에 없었다. 

 

-경찰은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뭘까. 일각의 주장대로, 검사장 1명을 표적 삼아 매장시키기 위한 것이었을까. '경찰의 역습'이었나.


경찰은 처음엔 체포한 사람이 제주지검장이란 사실 자체를 몰랐다. 일선 지구대나 경찰서 말단 직원이 검사장 얼굴을 한번에 알아보긴 쉽지 않았을 터, 여기에 김 지검장은 동생 이름을 댔다. 그냥 신고받고 체포한 공연음란 혐의의 잡범 '김씨'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김씨 신분은 곧 드러났다. 그리고 김 지검장이 혐의를 강력 부인하면서, 별거 아닌 잡범은 '현직 지검장 음란행위 의혹'으로 확대됐다. 경찰이 이를 입증하지 못하면 정말로 '검경 갈등'으로 비화될 수 있는 사건이 됐다.


-'유병언 시신 초동수사 부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성한 경찰청장은 최근 물러났다. 이 전 청장이나 강신명 신임 경찰청장 모두 '신뢰의 위기'라며 경찰이 국민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와중에 현직 검사장을, 당시엔 몰랐다지만, 현행범으로 체포까지 했는데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강 신임 청장은 취임 직후부터 위기에 내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경찰은 신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부터 끝까지 공식 브리핑은 없었다. 기자들의 요구에 따라 흔히 '백 브리핑'이라고 하는 상황 설명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그 흔한 CCTV 공개나 제공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근처를 뒤지던 언론사가 사건 현장으로부터 백 미터 넘게 떨어진 곳의 CCTV를 확보해 보도했다. 


-김수창 지검장이 처음부터 자신이 검사장이라고 밝혔다면, 출동한 경찰에게 항의했다면 경찰이 현직 검사장을 체포까지 할 수 있었을까. 고작 '공연 음란' 혐의로 말이다. 김 지검장이 기자회견을 자청해 자신은 결백하다고, 억울하다고 거듭 주장하지 않았다면 '진실게임'으로까지 비화하면서 이렇게 관심이 집중될 수 있었을까. (말초적인 호기심 차원에서 이 사건에 접근한 언론이 있었다는 것 역시 적어놔야겠다.)  "김 지검장이 처벌보다는 치료가 필요한 상태"라는 지적도 일리 있지만 '거짓말'에 대해서는 어떤 지적을 할 수 있을까.


-검사장은 차관급 대우를 받는다. 이 정도 위치까지 올라간, 잘 나가는 고위 공직자의 발목을 잡은 건 '공연 음란'이 아니라, 결국은 '거짓 해명' 때문이었던 것 같다. 검찰엔 매뉴얼이라도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무슨 의혹이 제기되면 부인부터 하고 본다." 등등.


"Honesty is the best policy,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오래된 경구가 새삼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