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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보건과 복지 사이 두번째

12월 첫날 건강보험공단에서 벌어졌던 일들

2014년 12월 1일, 나는 서울 지하철 5호선 공덕역 부근의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있었다. 오랜만에 가본 공단은 여전했지만 앞마당엔 노조에서 설치한 농성 천막이 있었다. '낙하산 이사장 저지 농성 28일째' 라고 써붙어 있었다.

김종대 전 이사장이 퇴임한 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최고 수장 자리는 2주 넘게 비어 있었다. 이미 후보 추천은 완료됐다. 청와대에서 재가만 하면 되는데 그게 늦어지고 있었다. 의사 출신인 성상철 전 병원협회 회장, 서울대병원장도 지냈던 이가 유력 후보였다.  노조에서나, 공단 임직원이나, 기자들이나, 성상철 후보가 이사장으로 임명될 것으로 예상은 했다.

그날도 그랬다. 별일 없이 오전이 지나가고 '오늘도 아닌가' 하고 있을 때, 오후 1시 반쯤 청와대 쪽으로부터 먼저 소식이 들려왔다.

"건보공단 이사장 임명한 것 같다는데?"

무슨 얘기지? 이사장 임명이란 게 5분만에 뚝딱뚝딱 이뤄지는 일도 아니고 기자들에겐 미리 알리는 게 관례다. 오후 1시에 임명한다면 오전 11시쯤엔 알려주고 그럼 기자들은 기사를 먼저 준비한다. 건보공단 이사장 임명이 국가 기밀도 아니고 이미 오래 끌어왔던 일이라 전격적으로 진행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공단 홍보실에서도 아는 게 없다는 반응이었다. 잘못 알려진 건가.

그리고 10여 분이 지나, 이번엔 홍보실에서 기자들에게 달려왔다.

"2시에 취임식합니다, 지하강당에서."
"지금 1시 50분인데 10분 뒤에요? 임명은요?"
"청와대에서 이미 임명했대요."


당황스러웠다. 10분 뒤에 취임식을 한다고? 급히 카메라기자를 부르고는 강당으로 달려갔다.
심영구 취재파일용
'제7대 성상철 이사장 취임식'이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날짜는 12월 1일, 좀전에 통보받았다면서 플래카드는 언제 만들었지? 취임식 한다는 방송을 듣고 직원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런데 2시가 지나도 취임식이 시작되지 않았다. 2시 10분, 강당 밖이 좀 술렁이는 듯해 나가보니 노조에서 강당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 앞엔 공단 임원들이 둘러싼 가운데 성상철 신임 이사장이 서 있었다. 왜 안 시작하나 했더니 주인공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영구 취재파일용
격한 몸싸움이 벌어지진 않았지만 노조는 격앙돼 있었다. 이런 식의 기습 취임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30여 분 대치하다 성 이사장 측은 근처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고 노조가 물러서지 않자 공단 6층 이사장실로 올라가버렸다. 그렇게 취임식은 일단 무산됐다.

그리고 2시간 정도 지나 다시 홍보실에선 기자들에게 조용히 취임식을 알렸다. 안내에 따라 6층에 가보니, 경비원과 직원들이 계단과 엘리베이터까지 모두 봉쇄하고 있었다. 노조 접근을 막기 위해서였다. 6층 대회의실엔 간부들 50여명이 이미 입장해있었다. 그렇게 성상철 신임 이사장의 두번째 취임식 시도는 성공했다. 취임식이 끝날 무렵 1층 로비엔 노조원들이 모여  기습 취임을 한 성 신임 이사장을 성토했다.

심영구 취재파일용심영구 취재파일용다음날인 12월 2일, 성 신임 이사장은 오전 8시 반쯤 출근하기 위해 공단에 도착했다. 이번엔 정문에서 막혔다. 노조원들 수십 명이 입구에서 성 이사장의 출근을 저지했다. 성 이사장은 10분 정도 공단 입구에 말없이 서 있다가 발길을 돌렸다. 공단으로 출근하지 못하고 전날 잡혔던 국회 보건복지위원장과의 면담을 위해 국회로 떠났다.

성상철 건보공단 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물론 노조는 물론 시민사회단체나 야당까지 반대하는 이력을 지닌 인사를 공단 이사장에 임명한 것부터가 잘못일 수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친박 낙하산 인사' '의료영리화 지지자' '병원 자본의 이익 대변'이 아예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닌 듯하다. 성상철 이사장은 박정희기념사업회 이사를 지낸 전력이 있다. 신현확 전 총리의 사위이자,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고교 후배이기도 하다. 서울대병원장과 병원협회장을 지내면서 민간의료보험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병원 입장의 대변자였다.

그렇다고 군사작전 진행하듯 기습 취임을 해야했을까.

12월 1일 점심 무렵 건보공단을 찾아왔던 복지부 대변인은 '이사장은 언제 임명되냐'는 기자 질문에 '모른다'고 답했다. 거짓말이었다. 복지부에선 2시에 취임식을 하라며 기자들에게 10분 전에 알려주라는 지침까지 내렸던 것 같다. 이건 추정이지만 사실인 듯하다. 

기자들도 화가 났지만 노조에서는 더 분노했다. 공단 이사장이 되면 앞으로 노조와도 많은 대화를 해야할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데 자신을 반대한다고 해서 아예 상대하지 않으려 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노조위원장을 취임식에 초청하진 못할 망정, 취임식장 입구에서 가로막게 만들어버렸다. 그렇게 성 이사장은 취임 첫날부터 모양새를 구겼다.  이게 성 이사장의 책임일까, 공단의 책임일까, 복지부의 책임일까, 그외 다른 데 책임일까.

김종대 전 이사장의 전례가 있다.

김 전 이사장도 3년 전 취임 당시에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건보 통합을 반대했던 사람이 통합 이후 건보공단의 이사장이 되면 다시 분리하려 들 것이라거나,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를 폐지할 우려가 있다거나 많은 비판을 받았고, 김 전 이사장의 출근은 저지당했다. 그래서 김 전 이사장도 기습 취임식을 해야했다.(그러고 보면 기습 취임식은 건보공단의 전통이 된 건가...)

하지만 김 전 이사장은 박수 받으며 퇴임했다. 지역가입자와 직장가입자가 내는 건강보험료 부과 기준이 다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선안을 만들어 논의 선상에 올려놨고 비만 관리 사업을 본격화하고 흡연 피해 소송도 제기했다. 재임 3년 동안 건강보험을 더욱 굳건하게 만든 인물이라는 최고의 평가도 나왔다.

성상철 신임 이사장도 3년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박수 받으며 떠날 수 있을까. 그런 것도 전통이 됐으면 하는 게 새로 보건복지를 담당하게 된 기자의 소박한 바람이다. 방해요소는 많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