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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보건과 복지 사이 두번째

"더는 종현이 같은 애가 없었으면..." '종현이법' 탄생시킨 엄마의 힘

기사보기=> 의료과실 희생 더 이상 없게...'종현이법' 결실



"투표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재석 180인 중 찬성 180인으로서 환자안전법안(대안)은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2014년 12월 29일 국회 본회의, 98번째 안건으로 올라온 환자안전법안(대안)이 이렇게 통과됐다. 정종현군이 백혈병 진단을 받은 2007년 4월 16일로부터는 2815일, 항암제 빈크리스틴이 종현군에게 잘못 투약된 그날 2010년 5월 19일로부터는 1686일, 종현군이 사망한 2010년 5월 29일에서는 1676일째 되는 날에 통과된 것이다.

지난해 12월 27일 이 사건과 그 뒤 법 제정에 나서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법 통과를 눈앞에 둔 종현 군 부모의 심경 등을 간략히 담아 8뉴스에 보도했다. 아들을 잃고 처음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기 위해, 이런 사고가 한 번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나서는,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한 매뉴얼 마련을 위해, 더 나아가 관련 법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나서는 법을 만들기 위해 종현 군 부모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노력했다. 백혈병 환우회로 시작해 이제는 환자단체연합회를 조직해 이끌고 있는 안기종 대표를 필두로, 여러 단체와 의원, 보좌관 등 많은 사람이 도왔고 이렇게 간단히 적는 게 죄송할 만큼 어려운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 

99%가 이뤄진, 진행된 순간에, 다 정리돼 있는 내용을 한 번 더 정리했다는 것만으로 뭔가를 적기가 겸연쩍다. 그래서 짧은 기사에서 못 담은 종현 군 어머니 김영희씨 말씀을 추려 담는 것으로 대신하려 한다. 법 논의 과정에서 반대 의견도 접하면서 처음 법 제정 취지엔 다소 못 미치게 된 조항들도 있는데 앞으로 남은 과제에 대해서도 관심 갖고 지켜보겠다. (실제 법 시행은 공포 이후 1년 6개월이 경과한 뒤다. 빨라야 2016년 하반기부터 시행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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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떠올릴 때마다 마음 아프시겠지만 다시 여쭤보겠습니다. 종현 사망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A. 그때 얼굴이 너무 이상했어요.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남편 보고... 저는 토요일날 일을 해야 됐고... (종현가) 다니던 한의원에 좀 가보라고, 안색이 안 좋다고 생각되니까, 한의원에 좀 데리고 가 보라고 (했죠). 그랬는데 그 한의사 선생님이 옆 병원에 가서 피 검사 한 번만 해보라고 얘기하셨어요.

그래서 피 검사를 했는데 병원에서는 아마 혈액암이라고 짐작했던 것 같아요. 종현 아빠한테 당부하기를, 헤모글로빈 수치가 너무 낮으니까 혹시 종현가 놀다가 쓰러지면 바로 구급차 불러서 병원 가야 된다고, 그렇게 얘기했대요.

그러고 종현와 토요일, 일요일 있는데 애가 축 처져서 TV만 보려고 하는 거예요. 힘이 없는 거죠. 그래도 조금씩 데리고 다니고 이랬거든요. 근데 월요일에 병원에서 전화가 와서 아무래도 혈액암인 것 같다고, 큰 병원에 한 번 가보라고 소견서 써주겠다고... 그래서 갔는데 그날 바로 피를 굉장히 많이 뽑았어요.

다음날 진단이 났는데 백혈병인 것 100% 확실하다고 (그랬어요.) 치료를 여기서 받을지 아니면 다른 병원 갈 지 결정하면 된다고 하고. 치료는 무조건 해야 된다고 그러고. 그래서 저희가 고민하다가 그래도 대구서 사니까 대구에서 치료받는 게 낫겠다 싶어서 그 병원에서 받기로 했죠.

Q. 그게 2007년 4월 16일이군요.

A. 네, 그때부터, 4월이었으니까 한 6개월 정도는 거의 입원해있었어요. 집중 치료기간이었어요. 잠깐씩 나오는 경우는 있는데 주로 병원에 있었어요.

Q. 항암치료를 받으신 거죠?

A. 네, 항암치료요. 백혈병은 고형암 하고 달리 혈액암이잖아요 . 애들 골수공장이 고장났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그 공장을 치료하기 위해서 치료기간이 길어요. 고형암은 수술할 수 있지만 (혈액암은) 골수, 체질 자체를 바꾸는 것이라 집중치료하는 것이고 또 병이 굉장히 다양해서요. 종현는 림프구성 백혈병이었는데 예후가 좋았어요. 예후가 좋기가 어렵거든요. 예후가 좋으면 완치율이 굉장히 높아요. 90% 이상 되거든요.

또 종현는 방사선 치료나 다른 치료 없이 이식 수술 없이 약물로만 치료가능한 백혈병이었어요. 그 대신 치료 기간이 좀 길고요, 다른 애들보다. 그래서 시작했는데 집중치료라고 몸의 면역을 완전히 초토화시키거든요, 골수공장까지. 그냥 면역을 0으로 만들어놔요. 사람 면역이 굉장히 높거든요. 높은데 그걸 약으로 초토화시키니까 이제 그때 죽을 고비를 애들이 다 넘기는 거죠. 그 기간이 정말 사망도 많이 하고 그런데 잘 넘겼어요. 종현도 위험한 고비가 몇번 있었는데 잘 넘겼는데 그게 6개월 걸렸고 그 다음에 집중치료해서 몸이 0인 상태로 만들고 그 다음부터는 사이클, 사이클을 주면서 이것을 약을 세게 넣었다가 약을 안 주고 그러면 다시 다 올라오잖아요. 다시 또 약을 세게 주고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것을 12주가 한 사이클이거든요. 그것을 종현가 12사이클을 받았어요. 그게 유지치료라는 거거든요.

12사이클 받아서 공식적으로 마지막 스케쥴이죠, 마지막. 진짜 이렇게 집중치료 4차 받고 유지치료 12차 중에 마지막 12차 시작하는 날, 스타트 하는 날이요. 그 날 주사가 바뀐 거죠.

Q. 그날 항암제를 잘못 주사했던 것이군요.

A. 네. 약을 동시에 넣게 돼 있거든요. 먼저 척추에 시타라빈이라는 항암제를 넣고 그 다음에 정맥에 빈크리스틴이라는 약을 넣어야 되는데 의사가 바쁘다는 이유로 시타라빈을 주사로 올린 거예요. 원래는 바이알로 올려서 이 바이알을 거꾸로 잡고 여기서 약을 빼고 인턴이 자세를 웅크려 주면 척추에다 넣으면 되거든요.

근데 이게 시간이 걸리잖아요. 원래 앞에 선임들은 이것을 다 지켰거든요. 뽑아서 넣는 걸 지켰는데 이날 주치의가 시타라빈을 주사로 올린 거예요. 그걸 두 개 꺼내놓고 바꿔잡은 거죠. 그래서 빈크리스틴이 먼저 척추로 들어가고 남은 약을 정맥으로 넣고 그렇게 됐던 거죠.

Q. 이날이 2010년 5월 19일입니까?

A. 예, 5월 19일날. (부작용이 나타났는데...) 저희가 치료기간이 길었잖아요. 3년 1개월 병원생활을 했는데 종현가 이런 부작용이 나올 수가 없었거든요, 그동안. 이런 부작용이 갑자기 나타날 수가 없잖아요. 원래는 그 다음날 낮에 퇴원하면 됐는데 그 다음날 새벽부터 아프다고 그랬기 때문에 퇴원 못한 거죠.

저는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종현 아빠는 혼자 계속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그러고서는 아무래도 주사가 바뀐 것 같다고. 과정이 그렇게 됐다는 걸 나중에 듣게 돼서 알았죠, 그건.

Q. 의료진이 주사를 잘못 놓은 걸 인정했나요?

A. 본인이 인정한 것은 아니고요, 다른 분 통해서 듣게 되었어요. 지금도 본인은 주사 바로 놨다고 하고 있거든요. 만약에 본인이 인정하면 형사처벌을 받아야 되니까. 제 3자가 고발을 해도 그렇게 돼서 본인은 평생 인정 못 하죠, 인정하고 싶어도 못 하죠.


Q. 주사를 잘못 맞은 이후 사망한 날은 5월 29일이죠, 열흘 만이네요.

A. 네, 열흘이요. 고비가 정말 많았거든요. 근데 진짜 강하게 그걸 다 넘겨왔던 아이인데 마지막에 걔가 받는 고통은 정말 이렇게 지켜보기 힘들 정도의 고통이었고. 그동안 그 많았던 고비도 다 잘 넘겼는데 그렇게 또 아파하면서 떠나니까 아이한테 많이 미안했죠.

종현가 왜 이 일을 겪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주사 잘못 맞고) 그리고 열흘이었는데, 걔가 굉장히 속도가 빠르게 나빠졌거든요. 수요일날 주사 맞고 목요일날 밤에 중환자실로 옮기고 금요일날은 제가 가도 제가 눈 앞에 있어도 절 찾더라고요. 엄마 어딨냐고. 엄마 여기있잖아, 그러니까 또 알아봐요.

근데 또 엄마 찾아요. 그래도 토요일까지는 의식이 있었는데 일요일날 인공호흡기를 착용했으니까 3일 만에 굉장히 나빠졌고 일요일날 인공호흡기 차고 그 후로 일주일동안 그냥 계속 의식이 없는 상태였거든요. 피검사 하고 여러 검사하면서 종현한테 치료는 계속 하더라고요. 그게 무의미한데도 계속 치료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수혈을 하는데 애가 새까맣게 변해요, 몸이. 또 의식 검사하는데 젖꼭지를 계속 꼬집었는데 여기가 계속 새까맣게 멍이 들었는데도... 그런 걸 보니까 제가 봐도 안 될 것 같거더라고요. 그래서 좀.. 그게 너무 고통스러워보이니까 종현 아빠한테 치료를 거부했으면 좋겠다고, 너무 힘들어보인다고 말했죠. 그러니까 종현 아빠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면서 그렇게 얘기했는데... 하루하루 꺼져가고 특히 마지막에 굉장히 안 좋을 때 많이 힘들었는데 실은 그게 계속 활동하는 그런 원동력이 된 것 같아요.


심영구 취재파일용
Q. 이후 4년 넘게 지났는데 계속 활동하게 된 원동력이라는 말씀인가요?

A. 그런 일은 있으면 안 되거든요, 있으면 안 되고. 그런데 그런 케이스가 많았고 백혈병 치료하는 아이들한테 빈크리스틴 사고가 많았고 그게 계속 반복됐는데도 아무도 안 알린 걸 알고 그래서 이게 원동력이 됐던 것 같아요.

처음엔 '나한테 일어난 일이 뭘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고...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일이 일어난 거잖아요. 저희 병원에도 10년 장기 입원했던 환자들이 많이 계세요. 한 아이는 중학교 때 들어왔다가 청년이 된 상태인데 의료사고 때문에 잘못됐고 병원에서 책임진다고 병원에서 10년을 입원시키고 돌봐주고 있는 아이였는데 그 (집) 언니한테도 여쭤봤어요. 이런 경우 있냐고 하니까 처음 본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그러냐고 그래서 전혀 몰랐다가... 종현가 빈크리스틴이 잘못 들어가서 그렇게 됐을 거라는 걸 예상을 하고 저희가 병원에다 논문을 요청했어요.

빈크리스틴이 잘못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논문을 찾아달라고 했는데 그것을 받고 그 내용을 보니까 그 케이스가 많더라고요. 해외 논문도 있었고... 이후에 우리나라에도 빈크리스틴 사고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됐고, 그래서 종현가 빈크리스틴 사고로 죽었다는 걸 말하기 시작하니까 그 말한 걸 통해서 (사례) 수집이 된 거예요. 

...빈크리스틴은 절대 들어가면 안 되는 약이기 때문에 들어가면 상행성 마비라는 특징이 있어요. 그리고 일주일이나 열흘 만에 사망해요. 몸이 딱딱하게 굳으면서 사망을 하는데 그게 다 일치를 했죠.

제가 주변에 종현가 빈크리스틴 사고로 떠났어라고 알렸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주변의 친구가 '내가 검색을 하다가 아버지가 자기 아들이 빈크리스틴 맞아서 죽었다고 글이 있더라'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글을 찾아내서 그 (사망한 아이) 아버지랑  통화를 했어요, 메일도 주고받고. 그러니까 아버지가 보건복지부에 알렸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보건복지부에 문의를 해보니까, 작년에 이런 걸 했다는데 전혀 모르더라고요. 전혀 모르고, 그 분도 병원하고 합의를 해서 이 일이 묻혔던 거예요. 병원하고 합의하면 언론에 유포하지 않는다는 게 합의문에 들어가거든요. 그러니까 사고가 덮히는 거예요...종현가 빈크리스틴으로 떠났다는 얘기를 하면서 저한테 계속 사례가 들어온 거예요.

그러니까 이 일을 왜 국가가 해주지 않았나, 병원에 해주지 않았나 싶은 거예요. 알리기만 했어도 모이는데, 이렇게 많고 어디에 가면 교수님들이 더러 일어난다, 애들이 몸이 석고처럼 돼서 죽는다 이런 얘기를 들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이야기가 쭉 수집이 됐죠.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죠.알려지기만 해도 수집이 되고 매뉴얼도 나왔잖아요, 올해(2014년) 4월인가. 매뉴얼까지 나왔는데 너무 쉬쉬하고 사고가 나면 묻어버리고 이러니까.


Q. 매뉴얼을 만들고 법 제정을 생각하고 그렇게 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A. 그 때 처음에 알렸던 것, 보건복지부에 민원을 제기하고 했던 게 시작이 된 것 같아요.  저는 8월 말에 민원을 넣었는데 2010년 9월에 보건복지부에서 답신이 왔어요. 이걸 병원에 조심하라고 하고 매뉴얼을 만들겠다. 그 민원은 국민 신문고를 통해서도 넣었고. 그때 매뉴얼이 병원협회와 의사협회에 다 갔거든요. 종양학회나 학회로는 다 갔는데, 그게 종이 한 장밖에 안 됐던 거죠.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

그게 사고를 막을 수는 없는 것 같고, 제 기억에는 2012년인 것 같아요. 그 때 10월에 0병원에서 빈크리스틴 사고가 또 일어나서... 빈크리스틴 사고가 굉장히 유명해졌는데도 사고가 한 번 더 났죠. 그런데 병원에선 전혀 몰랐고, 그런데 제가 너무 안타까웠던 게 종현 빈크리스틴 사고가 굉장히 알려지고 유명해졌으니까 0병원에서도 그 환자가 돌아가시고 나서 굉장히 빨리 합의하고 이걸 무마시키려고 애를 썼나봐요. 그건 그거고, 이 분이 같이 활동을 해주셨으면 좋았는데, 도움을 주셨으면 좋았는데 빨리 잊고 싶다고 그러면서 그냥 개인 합의로 끝나버렸어요. 더 이상 어떤 게 없었어요. 보통 그렇게 아픔을 잊고 싶어서 덮고 없어지는구나, 일이 그렇게 되는구나 한 번 더 보게 됐죠.


Q. 환자안전법안을 만드는 데 동참하시게 된 건 언제부터인가요?

A. 2013년 4월에 국회에서 토론회가 있었거든요. 국회에서 환자안전법 토론회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 전에 2012년 6월에 제가 환자 샤우팅카페(편집 주: 환자단체연합회에서 주관하는 환자가족모임)에 출연해서 그 때 처음으로 제 주장을 다 얘기를 했던 거죠.

...제가 구별을 한 게 이 사고를 겪고 나니까 집집마다 이런 일을 안 겪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다들 어려움이 있으시더라고요. 그래서 내 아이 죽은 것만 슬퍼할 순 없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도 이런 일을 겪고 마음 아파하고 있는데, 이건 내 개인적인 일이고, 이건 민사소송으로 풀어갈 거고 얘를 통해서 이 일이 안 일어나게 해야지.

종현 같은 사고가 발생이 안 돼야지, 내가 종현 엄마로서... 순서는 조금 바뀌었지만 이 일을 해야 종현가 안 생기는 거잖아요, 종현 같은 아이가. 그래서 구분해서 생각했어요. 저희가 피해자를 만나보면환자단체연합회와 같이 활동하는 게 민사소송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람들도 많은데, 제가 얘기해드리거든요. 그건 개인적인 거고, 그거 말고 얘를 통해서 뭔가 남겨야 할 게 있지 않느냐고. 그래서 제가 구분해서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저는 구분했는데, 개인적인 일을 해결하려고 이걸 열심히 한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이 활동했던 것 때문에 개인적인 일도 해결이 된 거예요. 저도 정말 신기했어요. 나중에 이거 활동했던 것 때문에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이 생겼고 그것 때문에 병원이 잘못을 인정하고 합의해주시고. 또 지나고 보면 합의를 해주셨기 때문에 종현 일을 알리고 하는 데 더 힘이 됐던 것 같아요.

심영구 취재파일용Q. 1인 시위도 하고 여러 활동을 하셨던대요.

A. 2011년은 1인 시위를 했었고요. 동대구역. 동대구역에는 사람이 엄청 많거든요. 여기를 왜 갔냐면 전국 사람들이 왔다갔다하고.. 종현가 이렇게 떠나갔고 이런 일은 다시 발생되면 안 된다.병원은 이 일을 인정하고 부모에게 사과해라. 그리고 이 매뉴얼을 만들어 달라고. 한 열흘 정도 했어요, 가을쯤... 9월 말에서 10월 초.

매뉴얼은 2014년 4월에 나왔어요. 이게 뜻 깊었던 게 보건복지부에서는 이런 사고가 났으니까 주의하십시오, 투약 매뉴얼은 이렇게 하십시오 하고 (전에) 보냈잖아요. 그런데 4월에 나온 건 7개 학회가 참석해서 굉장히 회의를 여러 번 거쳐서 나왔더라고요. 그 매뉴얼이 지켜질 가능성이 많은 거죠. 참여하는 학회가 많고, 이거를 공동 참여를 해서 의견을 나누고 했으니까 정말 바람직하죠. 간호사학회,종양학회 등 여러 학회에서 나와서 환자단체도 가셨고 인증원에서 주관하셨고, 이런 게 활발하게 일어나야죠.

심영구 취재파일용



Q. 환자안전법 관련해서는 국회의원들을 찾아가셨던 건가요?

A. 아, 2013년 2월에 제가 오제세 의원님을 찾아갔어요. 안 대표님하고 환우회 사람들하고. 저희가 문자 서명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이렇게 해달라고 했는데, 아마 관심이 있으셔서 부르셨던 것 같아요. 부르셨는지 약속 잡고 갔는지 같이 가자고 하셔서 그래서 갔고 4월 9일에 토론회가 열리면서 문자 서명을 마지막에 5천 명을 받았거든요.그 때 집중적으로 알려서 하게 됐는데, 문자 서명이, 전화번호가 013으로 시작하거든요. 중국 사기 전화번호라고 얘기가 나서 서명받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그 어려움 때문에 엄청나게 많이 알려야 했던 거예요, 웬만하면 안 하니까. 정말 많이 알려야 그리고 그 중에 누가 진심으로 믿어주고 보냈잖아요. 그 분이 괜찮다,보내라,진짜 맞다고 해서 주변 가족들과 같이 했고... 문자서명받기위해서 저도 여기 인근 성당이고 이런 데 찾아가서 쪽지 돌리고 신부님들 도움도 많이 받고, 그랬어요..

Q. 그때는 환자안전법이 정말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A. 될 거라는 생각, 못했죠. 못 했는데 이런 확신은 있었어요. 이 활동을 하면서 환자가 점점 더 안전해질 것이라는 생각... 제가 봤을 때 환자의 힘이 너무 약했거든요. 다 뿔뿔이 흩어져 있고. 다들 사고를 당하고 나서야, 환자의 유가족으로, 피해자가 되는 거잖아요.

어떤 힘을 키우고 이런 개념이 아니었는데 이 활동을 꾸준히 하면서 느꼈던 게 환자가 점점 안전해질 것이라는 거랑 환자의 힘이 강해질 것이라는 것. 환자가 모여서 힘이 강해질 것이라는 것, 그걸 믿었기 때문에 이 법이 되고 안 되고는 그냥 이렇게 쭉 걸어가는 거지, 이게 정말 중요하고 그러진 않았어요.

처음에 이렇게 민사소송건다고 했을 때 의료사고로 거는 거였잖아요. 그니까 친정 부모님도 반대하셨죠, 이제 와서 어떻게 하게 그러냐고. 원래 어른들은 또 옛날 살아오신 세월에서 애들이 떠나면 빨리 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시잖아요. 친구도 많이 반대했어요. 보통 이런 일이 너무 어려워서 부부싸움도 많이 하고 이혼도 많이 한다던데 웬만하면 하지 말라고 처음에 많이 말렸는데 남편하고는, 너무 억울하니까 이대로는, 그대로는 못 잊겠다, 그대로는 못 살겠다, 그대로 살면은 살아도 산 게 아닌 것 같다고. 남편도 똑같은 마음이었죠. 이 사람은 가정을 책임져야 되니까 일을 했고 제가 활동을 계속 했는데 남편이 안 말렸어요. 제가 또 결심했던 게 이 일을 하면서 내가 불행해지면 오히려 이 일을 시작하지 않는 게 맞다고,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고 어느 가정보다도 건강하게 살겠다고, 그렇게 노력하면서 하겠다고 그렇게 결심했고.

Q. 사고 이후 4년이 지났습니다. 요즘 심경은 어떠신가요.

A. 생각을 이렇게 한 번씩 해보거든요. 저는 또 활동하는 게 환자 샤우팅 카페 나가는데...거기는 발표하는 분들이 발표할 때 들어주는 자세가 정말 중요해요. 제가 경험했기 때문에 알거든요. 제가 앞에 나가서 얘기할 때 누군가 이렇게 안타까워하면서 들어주는 그게 굉장히 중요하고 저희 샤우팅 카페 출연자들이 한번 자기가 발표를 하면 가서 방청으로, 객석에 앉아서 듣거든요. 그러면서 거의 매달 있었는데요. 그 때마다 새로운 환자들을 알게 됐어요.

그런데 매번 가슴이 아픈 거예요. 저는 이렇게 시간이 4년 반 지나서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고 지금은 종현 그 때당시 떠올릴 때 그때 굉장히  힘들고 울지만 일상생활은 잘 하고 있거든요. 근데 그분은, 그분들은 일상이 안 되시는 거예요. 정말 죽고 싶은 고통으로 살고 계시고 늘 거의 매달 보잖아요. 보고 계속 이런환자가 있다는 걸 아니까.

그래서 환자안전법이 생기는 게 정말 기쁜 일이긴 한데요. 그 분들이 너무 슬퍼하고 계시기 때문에 저는 같이 슬픈 거예요. 그래서 이 법이 정말 만들어지면 잘 구동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런 마음이 있고 그래서 법이 통과돼도 마냥 기뻐할 수는 없어요. 그냥 그런 환자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의료사고 나는 것 봤을 때 양심있는 의사들이 있잖아요. 근데 의료사고가 나면 다 피해자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치료하는 사람은 이 사람을 낫게 하기 위해서 했다가 어떤 실수나 시스템 오류나 이런 것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나잖아요. 환자 샤우팅 카페 가서 들어보면 의사들이 괴로워서 자살하는 경우가 많아요. 의사도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데 이 법이 정말 양심있게 진료하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잘못한 오류나 이런 것을, 아니면 어떤 실수들을 그런 실수들을 이렇게 보고해서요. 보고해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환자는 피해자고 의사도 자기 치료를 하려다가 고의적이 아닌 실수로 그렇게 되잖아요. 조직 안에서 말을 못 하니까... 그래서 이 법이 생겨서, 적어도 보고가 되어서 익명으로 보고되지만 그 분들이 이것을 다시 재발이 안 되도록 방지할 수있도록 하는 거니까.

Q. 종현 생각은 요즘 얼마나 하시나요?

A. 가끔 잊죠. 가끔 잊는 거고. 늘 생각을 하고 있죠.

...제가 걔를 보내주려고 되게 애를 많이 썼던 것 같아요. 계속 혼자 운전하거나 그럴 때마다 계속 울면서도 종현는 내 곁에 없다, 있다고 생각하면 떠나는 게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그런데 그걸 받아들이려고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생각보다 어려운데 기간이 길어서 괴롭고... 삶이 괴롭고 그렇게는 안 되고 지나온 것 같아요. 

늘 느끼거든요. 다니면서 내가 이렇게 있어도 아무리 큰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5분만 숨 참으면 죽는데, 우리가 뭘 그렇게 가지려고 아둥바둥하고 정말 몸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태어났잖아요. 그러니까 그 너머를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걸 정말 좋게 한번 풀어봤으면 좋겠다고, 종현가 죽었는데 다시 살릴 수가 없잖아요. 그리고 저희가 저희 억울한 거 풀자고 종현 몸에 손대지 말자, 부검하지 말자고 결심을 했었고 대부분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마음을 포기했던 것 같아요. 무조건 좋은 쪽으로 풀자고 했는데 형사고발이나 이런 쪽으로 갔으면 다툼으로 가고 이 법이 안 만들어졌을 것 같은데 저희 진심이 통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도와주신 분들도...그렇게 나가니까 도와주시는 분이 생기는 것 같아요. 어떤 공격이 아니고 다같이 안전하게 만들자고 했던 게. 

제가 종현를 만약에 키우고 있었으면 이것보다 더 힘든 생활을 해왔을 것 같아요. 얘는 면역이 거의 없기 때문에 데리고 나갈 때 항상 조심해야 했거든요. 제가 굉장히 무딘 편이었는데도 주의해야 할 게 많았어요. 그래서 종현 키운 거에 비하면 이 활동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거든요. 종현 법이 완성이 되면 종현를 계속 내가 키워온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러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