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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보건과 복지 사이 두번째

담뱃갑 경고사진, 2년 넘게 논의 않고 시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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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파는 담뱃갑 앞면과 뒷면, 옆면에 표기된 흡연 경고문구다. 각각 면 넓이의 30% 크기 이상을 차지해야 해야 한다.(국민건강증진법 시행규칙에 명시)

경고문구 표기 의무조항은, 국민건강증진법이 제정된 1995년 당시부터 있었다. 이때는 앞면과 뒷면, 20% 이상이었다. 11년이 지나 2006년 이 크기는 30% 이상으로 늘어났다. 6년이 흐른 뒤 2012년엔 옆면에까지 경고문을 넣도록 했다. 2013년엔 이 면적을 50%로 확대하는 방안이 추진됐는데 부처간 이견으로 흐지부지됐다.

담배를 피우면서 이 경고문을 읽어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경고문구 덕분에 담배를 줄이거나 금연하게 되는 이는 또 얼마나 될까. 50% 이상으로 커진다고 해도 큰 효과는 없을 것 같다. 눈에 잘 띄지도 않고 내용도 참 점잖은 안내다.  

외국에서 파는 담배는 경고문도 화끈하다. ‘흡연은 죽음이다’ ‘흡연하면 일찍 죽는다’ ‘흡연은 성기능 장애를 일으킨다’ ‘흡연은 태아에게 위험하다’ 등등.

심영구 취재파일용
복지부나 금연단체 등에서 그래서 줄기차게 추진하고 있는 게 '흡연 경고사진' 부착이다. 오랜 흡연 때문에 폐암에 걸린 환자의 신체 부위, 썩어가거나 망가진 폐나 혀나, 목 등의 사진이 담뱃갑의 50%, 80% 크기로 앞면 뒷면에 떡하니 붙어 있다. 잠깐만 들여다봐도 혐오스러울 정도다. 시각으로 접한 충격 효과가 상당하다는 건 대부분 인정하는 바다.

담배회사에서 알아서 할 리가 없다. 법으로 강제해야 하기에 2002년부터 담뱃갑에 경고사진 부착을 의무화하기 위한 법 개정이 추진됐다. 11차례 법 개정안이 발의됐는데 처리된 게 하나도 없다는 게 복지부 설명이다. 정부 안에서도 담배 판매가 줄게 되면 세수 감소로 이어질 것이란 기획재정부의 우려가 있었고 매출에 큰 타격이 있을 것을 걱정한 담배회사들의 반대도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심영구 취재파일용
2014년 6월, 담뱃값을 대폭 올릴 것이란 정부 방침이 공개됐다. 석 달 뒤 정부는 범정부 금연종합대책을 발표했고 여기에는 담뱃값을 2천 원 인상하는 가격 정책과, 담뱃갑에 경고사진을 부착하고 소매점에서 담배 광고를 금지하며 금연 치료를 지원하는 비가격 정책이 들어 있었다. 그중 핵심은 담뱃값 2천 원 인상, 담뱃갑 경고사진 부착 두 가지였다.

복지부는 이를 위한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을 마련해 대책 발표 다음날인 9월 12일 입법예고했고 입법예고기간은 단 나흘, 이례적으로 짧았다. 신속히 국회에 제출해 연내 통과시켜 내년부터 적용하기 위해서였다. 국회에는 9월 22일 제출됐고 해당 상임위인 보건복지위원회에 9월 23일 회부됐다.

그리고 두 달 반 가량 지나 12월이 됐다.

개정된 국회법에 따라 11월 30일까지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활동 시한으로, 이 기간 동안 예산안 합의를 못하면 정부 원안이 자동으로 본회의로 넘어가는 상황이었다. 예산을 위해 함께 통과시켜야 하는 예산부수법안도 함께 상정된다. 여야는 예산 심사 기한을 이틀 연장했고, 예산안 처리 시한인 12월 2일 안에 수정안을 만들어 제출하기로 합의했다.

그런 와중에 12월 1일, 보건복지위원장과 복지위 여야 간사위원은 정부가 제출한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에서 담뱃갑에 경고사진을 부착하는 조항을 삭제하기로 합의했다. 이 부분은 예산과는 관련이 없고, 또 상임위 차원에서 논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산안을 먼저 통과시킨 이후에 논의하겠다는 이유다. 예산안 법정 처리시한이 얼마 남지 않았던 탓도 컸다.

먼저 예산과 관련이 없는 건 맞다. 담뱃값 인상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세수 확대가 기대되고, 이로 인한 추가 세입을 어디에 활용할지도 큰 관심이었다. 그래서 담뱃값에 포함된 국민건강증진부담금을 올리는 조항은 살아남았고 담뱃갑 경고사진 부착은 삭제됐다.(담뱃값 물가연동제도 삭제됐는데 이는 당장 내년도 예산과 관련이 없다.)  법정 시한을 지키는 게 시급했다는 설명도 수긍이 간다. 국회 선진화를 위해 시한을 정해놓고 그 시간을 넘기면 자동 상정되는 식으로 법을 바꿔놨는데 정말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법을 지켜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국회의 조치 때문에 정부가 내놓은 금연종합대책은 반쪽짜리가 돼 버렸다. 성인 남성 기준으로 43.7%, 아직도 10명 중 4명 이상이 담배를 피운다는데 이를 획기적으로 감소시킬 필요가 있어 담뱃값을 2천 원이나 올리고 경고사진 부착 등 특단의 대책을 시행하겠다던 정부 설명이 대단히 궁색해져버렸다. "흡연자 주머니 털어서, 국민 건강을 빙자해 세금 더 뜯어내겠다는 것 아니냐"던 흡연자들의 주장을 제대로 반박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복지부 인사들은 국회가 또 망쳐놨다는 식으로 은근히 볼멘소리를 쏟아냈다.

그러면 이게 온전히 국회의원들 탓일까. 


먼저 금연종합대책이 반쪽짜리가 돼 버렸으니 복지부 입장에선 크게 불만이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복지부 입장이다. 국회에서 '담뱃값 인상+담뱃갑 경고사진'을 패키지로 꼭 통과시켜줘야 할 의무는 없었던 것이다. 내년부터 시행하겠다며 9월에 대책을 발표해놓고 밀어부친 셈인데, 이를 꼭 국회에서 수용해야할 이유는 없다. 행정부와 입법부는 엄연히 독립돼 있으니. 이런 면에서 볼 때는 정부 책임도 상당하다.

의원들 입장에선, 상임위에서 논의가 되지 않았다고 설명한 건, 일정 정도 맞는 말이다. 해당 법안이 9월 23일 회부됐는데 그 뒤 10월과 11월, 보건복지위는 국정감사와 예산안 심사 때문에 개별 법안을 심사할 여유가 별로 없었다. (정말로 없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허나 심사를 할 수 있었는데 안 했다고 할 만한 근거도 없다.) 상임위에서 논의도 안한 내용을 통과시킬 수 없다는 설명은 따라서 타당하다.

그러나 과연? 하는 의심도 든다. 이전엔 어떻게 했을까. 앞에 적었듯 2002년 이래 담뱃갑에 경고사진을 부착하는 내용의 법 개정안이 11번이나 제출됐지만 아무것도 처리되지 않았다. 이전 국회에서 제출됐던 법안은 전부 자동 폐기됐다.

19대 국회 들어서는 2012년 9월 문대성 의원, 2013년 1월 안홍준 의원, 2013년 3월 김재원 의원이 각각 경고그림을 부착하는 내용이 들어있는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짧게는 1년 9개월, 길게는 2년 넘게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통상 법안 논의는 상임위 전체회의에 상정, 소위에 회부, 소위에서 논의 뒤 다시 전체회의 상정, 처리, 이후에 법사위로 넘어간다.)

즉, 2014년 9월 23일 회부된 정부의 법 개정안을 논의할 시간이 없었다는 건 수긍할 만하다. 허나 비슷한 내용의 법안들이 이미 제출돼 있는데도 제대로 논의 한 번 하지 않았던 건 복지위 소속 의원들이 이 사안을 그리 비중있게 고려하진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게 한다.

심영구 취재파일용
여야 의원들은 "보건복지위 위원들은 경고사진 부착을 모두 찬성한다" "추후 상임위에서 처리할 것"이라는 설명 혹은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이 지켜지길 기대한다. 남은 정기국회 기간, 혹은 12월 임시국회에서도 처리하지 않는다면 국회와 정부는 또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했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