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과 생각

그날 떠들었던 세월호 1년 생각

세월호 참사 1년을 앞두고 뉴미디어부에서 마련한 팟캐스트 녹음에 몇 명이 모였다. 사실 그 자리에 가고 싶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로부터 1년 동안 달라진 것도 없고 달라지도록 노력한 것도 없었다.('거의'라는 수식어를 넣든 빼든 별 차이 없다.)


내가 몸담고 있는 언론사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세월호 1년을 맞아 준비하는 것들은, 담당자의 노력에도 그저 그렇게 보였다. 공교롭게 불거진 '성완종 파문'에 세월호는 뒷전이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1년이 지났다고 떠들나 싶은 생각이었다. 그래도 강하게 거부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나갔다. 그리고 1시간 40분에 걸쳐 주절주절 떠들었다. 그 결과물은 팟캐스트로 올라갔고, 전문은 인터넷을 통해 유통됐다. 


2015년 4월 16일도 지나갔다. 4월 17일엔 1년 전 같은 부서에서 세월호 취재를 주로 했던 선후배 10여 명이 모였다. 팟캐스트에서는 조금씩 바꿔가야겠다고 마무리했지만 그냥 이렇게 흘러가버릴 것 같아 더 참담하다. 무력하다. 


그래도 기록 차원에서 남긴다. 뒤에 다시 읽고 부끄러워하기 위해 이렇게 옮긴다.


-----------------------------






[오디오 취재파일] 세월호 1년 -우리는 왜 그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을까(1)

[오디오 취재파일] 세월호 1년- 우리는 왜 그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을까(2)



[심영구 / SBS 기자 – 세월호 참사 당시 팽목항 취재 담당]

사실 저는 4월 16일 생각을 하면은 세월호 참사 생각을 하면, 그 당일날 아침에서 진도 현장으로 내려가기 전까지는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이 나고요. 그 다음부터는, 사실 잠도 잘 못 잤고 하루가 딱 단절이 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 있었거든요. 4월 16일은 오히려 기억이 잘 나는 편인데, 아침까지는요. 전날 좀 술을 많이 마시고 아침에 좀 경찰청에서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널브러져 있어가지 고 오늘 일정들 챙기고 그러고 있었는데, YTN에서 속보가 나왔죠. 한 9시 20분 좀 넘어가지고 여객선이 침몰하고 있다. ' 어? 저거 뭐야.' 다들 이러고 있는데, 일단 현장이 너무 머니까 일단 뭐 상황 보자 이러고 있는데. 거기 승객 분 전화 연결을 하더라고요. 전화 연결을 해서 YTN에서 지금 상황을 물어보는데 승객 분 음성이 너무나 평온하고 너무 차분하게 연결을 하셔가지고 아 별거 아닌가 보다 그런 생각들 을 하고 있고, 회사 안에서는 보니까 속보 준비를 하고 그런 상황이었고, 저희도 좀 알아보고, 그런 상황이었는데 11시가 넘어서 다 같이 전원 구조 됐다는 오보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 

[심영구]

그러니까 저희도 그런 걸 좀 믿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저희도 아침에 이 사고 나고서 팀이 내려갔는데 내려갔다가 '이거 전원 구조될 텐데, 구조됐을 텐데, 설마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대명천지에 설사 한 두 명의 피해자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대형사고가 날 수 있겠어?' 라는 생각을 했고. 그러고 먼저 내려가는 후배들한테도 너희 가서 그 날 상황 정리하고 내일 올라올 거야. 맛있는 거 먹고 와. 거의 그런 분위기였거든요 처음에는. 그러다가 제가 연락 받고 내려간 게 1시 좀 넘어서였는데…

 

... 

[심영구]

한 9시 40분? 나중에 해경에서 제공한 영상 통해 재구성 해보고 또 교신 내용들 보면서 죽, 9시 쯤 배가 기울기 시작한 때부터 해서 재구성을 많이 했었는데. 보면은 가장 먼저 구조됐던 사람들이 선장과 선원이잖아요. 이준석 선장과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다 밖으로 나와서 기울기 시작한 배에서 갑판이나 난간 쪽으로 나와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고 가장 먼저 도착한 해경 123정은 나름대로 열심히 달려와서, 소식을 들은 다음에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도착해가지고 선장들하고 선원들이 나와 있는데, 거기서는 몰랐다고 주장을 하죠. 몰랐다고 주장을 하면서 그 사람들을 가장 먼저 구한 거고. 그 사이에 인제 방송실에서는 지금 움직이면 위험하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을 했고. 또 아이러니한 거는 그 방송을 했던 직원은 죽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방송을 했던 직원은 그 방송만 하고 있다가 탈출을 미처 못했고요. 그니까 그렇게 방송실에다가 이렇게 해놓고 있어 정도 지시만 해놓고 그 다음부터는 나 몰라라 탈출을 한 거고. 해경 123정은 그 큰 배에 다른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 파악 같은 건 안 해보고, 탈출하라는 방송도 처음에는 했다고 주장했는데, 나중에 사실이 아닌 걸로 밝혀졌죠. 그런 방송도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만 구해냈고.


저희가 사실 첫날인가요, 둘째 날인가요. 둘째 날 정도였던 거 같은데 해프닝 같은 게 있었습니다. 며칠 더 지난 다음인데, 해경 대원 중 한 명이 기울어져가는 배 위에 올라가서 구명벌이라고 하는 거를 발로 차가지고 떨어뜨리려고 노력하는 게 영상에 있어서, 그걸 가지고 일종의 미담처럼 이렇게 용감하게 기울어져 가는 배에 올라가서 노력을 했다.


그런 거를 기사를 쓴 적도 있는데. 나중에 보니까 전혀 사실은, 도움도 안 되는 일이었고. 그거하고 있을 시간에 사실은 들어가서 안에 누가 더 있는지. 또 있으면 나오라고 하는 그런 거를 해야 하는 시간에, 풀리지도 않는, 철사를 묶어 놔서 풀리지도 않는 구명벌을 발로 차고 있는 해프닝 같은 것도 있었고…

 

...

[심영구]

나중에 창문을 부수면서 그걸 통해서 사람을 구조하고, 그런 장면도 나오긴 하는데. 어쨌든 초반 대응이라는 면에서 너무나...뭐 나름대로 열심히는 했어요. 뭔가는 열심히는 했는데. 방향성에서 전혀 맞지를 않았고. 매뉴얼 없이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해경이나 아니면, 오히려 민간어선이나 민간구조팀에서 와서 더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데. 뭐 그런 좀 한심한 상황이었죠.

 

...

[심영구]

저희 같은 경우도 현장에서 중계를 계속 하면서, 팽목항에 주로 있다가 나중에 동거차도로 들어갔는데. 팽목항에서 첫 날 가가지고 피해자 가족들. 희생자 가족들이 다 살아 있을 거란 기대를 가지고, 소식들을 기다리면서 팽목항에 있을 때인데. 날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다들, 아무 것도 들어오는 게 없었어요.


배가 들어오는 바다를 향해 서가지고 다들 멍하니 앉아 있는데 그 뒷모습을 이쪽에서 바라보면서 뭐라고 얘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 때 사진을 제가 한 장을 찍었는데 핸드폰으로 그 이후로는 사진을 한 장도 못 찍었어요. 그 이상 제가 사진을 찍는다는 것도 힘들었고…

 

그 다음에 저는 되게 기억 남는 순간 중 하나가 둘째 날 밤이었는데, 인제 다 천막 쪽에, 다들 지치기도 했지만 계속 얘기들도 하고 있을 때인데 어머니들 위주로 죽 수십 명이 모여가지고 거기서 무릎을 꿇고 앉아가지고 제발 살려달라고 제발 구해달라고 통곡을 하면서 애원하듯이 기도를 하는데, 같이 있던, 다른 남자 기자들이나 해서 다 같이 그냥 저희도 그냥 꺼이 꺼이 울었거든요. 너무 참혹한 광경이고.


그때 순간이 사실 저는...어두워져 갈 때의 팽목항 바다를 바라보던 가족들의 뒷모습, 그리고 둘째 날 밤에 가족들이 다 같이 무릎 꿇고 앉아가지고 통곡하던 모습. 그게 되게 잊혀지지 않는...첫 날 둘째 날의 광경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 

[심영구]

그렇기도 하고. 한국이면 그래도 나름대로 올림픽도 치르고 월드컵도 치르고 경제규모도 많이 성장하고 나름 선진국 반열에, OECD에도 가입했고 그런 나라에서 이런 어떻게 보면 후진적인 참사가 났다는 게 너무 대비가 된다는 그런 느낌도...

 



... 

[심영구]

음…어… 저는 일단 그날 제가 전에 편집부에 있었다는 이력 때문에 그날 8시뉴스 현지 앵커 연결 코디네이터 역할을 좀 같이 했거든요. 그때는 일단 사고내지 말고 어떻게든 포인트 잘 잡아서 방송을 해야 된다는 게 전부였고, 거의 전부였고. 중간 중간에 시간 뜰 때 제가 취재를 하고 그랬던 건 아니니까 처음에는. 


그 다음에는 중계차, 현장 중계를 계속 물리면서 그러면서 돌아가니까 거의 기계적으로 15분 지나면 또 들어가고 15분 지나면 또 들어가고 그리고 또 밤새고, 그리고 2시간 자고 나와 또 들어가고. 중간 중간에 가족들이 바다를 나가겠다. 돌아왔는데 성과가 없다. 상황이 어떻다. 그런 얘기들을 단편적으로 접하다 보니까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간 것 같아요.


그렇게 며칠이 흘러갔는데 내가 정말 여기서 가족들이 원하는 얘기도 있고 현장에서의 상황이 잘못 전달되고 있는 부분들이 있고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저도 거기 갔던 기자들 중에는 조금은 고참인 편에 속했는데, 다른 선배들도 계셨지만, 그런데 제가 거기서 뭘 컨트롤 하거나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되게 변명 같지만 아니었거든요.


그런게 처음에는 정말 정신 없이 지나갔고. 몸도 힘들고 마음도 힘들고, 할 거는 많고 그러니까 지나갔는데 조금 지나니까 되게 무력감 같은 게 느껴졌고. 그렇게, 그런 게 각자 현장이 비교적 좁은 지역에서 벌어졌다고 하지만 현장이 여러 군데로 나뉘어져 있고, 나눠져 있는 현장에서는 기자들이 여러 명 있지만 각자 흩어져서 취재를 하고, 일들을 하고 있는 상황이고, 그런 것들이 모여서 인제 그런 취재했던 팩트들이나, 모여서 저희 뉴스나 속보로 연결이 되는 건데, 그런 것들은 서울 에서 컨트롤 하는 건데, 거기까지의 의사소통은 분명히 안 되는 부분이 있고. 각자 쪼개져 있으면서, 저는 그런 생각들을 좀 지나서 하게 되지 않았을까.

 

가족들이 좀 전에 조을선 기자가… 저희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될 때 쯤에는 이미 가족들이 불신하기 시작하는 거죠. '니 네 우리 얘기들 별로 넣어주지도 않고. 니 네 마음대로 썼잖아.' 라는 식의 상황들이 벌어지고서, 아차, 싶은 부분이 생겼는데. 이미, 뭐라고 할까요. 골든타임이 좀 지나갔다고 할까요. 그런 생각이 좀 들었습니다.

 


...

[심영구]

그러니까, 일관되게 처음부터 이야기했던 게, 진상 규명, 재발 방지, 책임자 처벌. 딱 3가지 얘기들을 했는데. 이 부분들이, 그 3가지 중에 뭐가 진척이 됐나. 돌아보면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진척된 게 하나도 없다, 또는 거의 없다. 라고 유족들이나 국민대책위라든지 쪽에서 주장하고 있는데 저는 그게 상당히 설득력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일단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이 되게 반 쪽짜리라는 이야기, 유족들도 계속 농성도 하고 한 끝에 힘들게 됐는데 그 후속 작업으로 진상 조사를 위한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조사위원회를,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원래는 1월부터 조사위원회 활동이 시작됐어야 하는데, 그 조사위의 구체적인 내용을 규정하는 시행령을 제정하는 문제를 놓고서 지금까지 다투고 있거든요.


특별조사위에서는 특별법이 있고, 법의 구체적인 내용을 정하는 게 시행령과 시행규칙인데, 조사위에서는 특별법에 규정된 대로 거기서 할 수 있는, 원래 길어야 시간이 1년 6개월이란 한정된 시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최대 범위 내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서 인력이든 지원이든 그런 부분들을 시행령에 담아서 제출을 했는데, 그걸 해수부에서 다시 조정해서 낸 거는 훨씬 그것보다 후퇴한 내용들. 그리고 그런 식이 되니까 그것 때문에 아직까지도 시행령이 통과가 안되어가지고 특별조사위 활동도 지금까지 멈춰있고요, 올해 들어서 넉 달이 지났는데 멈춰있고....

 

... 

[심영구]

재발 방지라는 것이 사실...딱 그런 질문을 던져 보면 될 것 같아요. 우리 사회가 지금 다시 일어나선 안되겠지만 세월호와 유사한 사건이 다시 발생했을 때 그럼 우리는 304명 이라는 희생자를 낳지 않고 전원은 아니더라도 상당 인원을 구조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을 던져 놓고서 거기에 자신 있게 그럴 수 있다고 답할 수 있는 대통령이든 총리든, 정부의 책임있는 당국자가 누가 있을까? 저는 아무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부분만 봐도 명확한 것 같고. 그 이후에도 사실 우리가 상황은 다르지만 크고 작은 안전 사고들은 끊이지 않고 났거든요. 그러면서 세월호를, 항상 우리 언론들이 비판도 그렇게 했지만 세월호 사태를 겪었는데도 또 이런 사고가 났단 말이냐, 그런 얘기를 했는데 바뀌지 않는 부분이 계속 존재하니까 그런 상황인 것 같고.

 

...

[심영구]

자성의 목소리가 많이 나오긴 했습니다.

 

이게 뭐 외부에서 그런 공격을 받고, 외부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고 사실, 보도의 당사자였던 분들이니까. 그런 분들한테 공격을 받고 비판을 받고 그러고서 안팎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와서… 이를테면 저도 참가했었습니다만, 방송 기자 연합회 저널리즘 특위라는 데서 재난보도, 세월호 보도에 국한해서 ‘세월호 보도…저널리즘의 침몰’이라는 모니터 보고서를 냈습니다. 그래서 이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한국 방송의 한국 언론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게 재난보도분과의 공통적인 인식이었고요.

 

그리고 제가 아까 말씀 드렸지마는 다음에도 이런 참사가 일어난다면은 구조할 수 있느냐는, 어떤 구조 당국의 문제일 수도 있고, 그런데 ‘과연 우리는 다르게 보도할 것인가?’ 라는 부분에서…

 

저는 한 석 달 넉 달 그때 한창 저희가 작년에 참사 발생한 직후에 그로부터 좀 지났을 때 반성하고 한창 그랬을 때는, 좀 ‘다시 그런 게 난다면 다르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 1년이 지난 지금에서는…겪었던 사람들은 좀 다르게 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어요. 그런데 그게 과연 이 참사가 몇 년 더 지나가지고 몇 년 지나서 새로운 사람들이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또 그런 사건이 난다면 다르게 보도할 것인가?

 

결국은 그런 반성을 했고 그런 트라우마, 저희도 일종의 트라우마를 겪었는데, 그런 사람들, 그런 언론 종사자, 기자들은 좀 그 때의 기억 때문에 다르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게 이제 매뉴얼로 돼서 어떤 언론사 조직의 시스템이 돼서 내려오지 않는 한 전승이 되고 교육이 되고 실천이 되지 않는 한은 똑같은 식으로 보도할 수 밖에 없는 지금의 언론 구조고 환경이다.

 

속보 경쟁에 매몰되어있고, 당장 시청률과 조회수, 그런 것들에 매몰돼 있는 환경이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런 경험을 했던 우리들, 그리고 그런 이런 비난을 받고 기레기라는 취급을 받고 했었던, 지금 세월호 참사를 취재했고, 보도를 했던 (언론)종사자들이 얼마 전에는 이제 방송기자연합회에서 주최한, 세월호 보도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방안들을 마련해야 한다는 어떤 지침 같은 것도 만들긴 했는데요. 그런 것들을 방송사에서 실천해야 된다는 토론회를 열기도 했는데, 그런 것들이 이제 1년이 지났으니까 이제 지난 것 아니냐 라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 정도로 좀 구체적인 실천 방향들을 만들어야 된다. 그런 생각들이 조금 듭니다.

 

...

[심영구]

정부조직이 개편돼서 행정안전부가 안전 부분이 떨어져 나가서 국민안전처가 됐고요. 인사 기능도 빠져서 인사혁신처가 됐고, 그렇고 해경이 수사권을 경찰 쪽으로 넘겨주고 국민안전처 밑으로 갔고…


그런데 이게 사실은 뭐, 안전을 전담하는 조직이 생긴 것 자체는 괜찮은데, 약간 공무원들한테는 크게 의미 있는 변화인데 국민들한테 얼마나 의미 있는 변화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다음에 세월호 진상 규명이나 그런 부분을 위해서는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이 됐는데… 이 부분 이제 제정될 때까지만 해도 뭐 그럭저럭 갔는데 정치권에서 진영 논리가 그 다음부터 강하게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 때 제정했던 취지와 이후의 진행되는 부분들을 보면 많이 의미가 퇴색하고 희석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좀 하고 있습니다.


... 

[심영구]

이거와 관련해서 ‘꼬리가 몸통을 흔드나 몸통이 꼬리를 흔드나’ 라는 카피를 뽑았던 어느 기사가 있었는데요.

 

특별법이 시행령이라는 게, 특별법의 내용을 하위적인 내용을 세부적으로 규정하는 건데, 즉 시행을 위한 대통령령인데…

 

그런데 이게 거꾸로 특별법의 내용을 침해하고 권한을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지금 정부의 안을 만들어졌다는 게 핵심적인 주장 같아요. 이석태 위원장 같은 경우도 그런 얘기를 하셨는데 ‘이 특별법 시행령 안은 특별조사위에 권한과 임무를. 임무와 기능을 마비시키고 무력화시키고 행정부의, 해수부 같은 곳의 하부조직으로 전락시킬 우려가 있다.’ 이렇게까지 얘기를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고요.

 

이 부분들이 사실은 맥락상으로 볼 때 새누리당 어느 의원은 처음의 냈던 특위의 시행령 안을 놓고서 세금 도둑이다 도둑놈 심보다 라는 식으로 얘기까지 한 적이 있는데 이런 식으로 좀 물타기를 하면서 희석시키는 부분들이 분명히 반영이 된 게 아닌가. 그럼 이런 걸 보면서 유족들은 ‘정부가 진상규명을 할 의지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는 그런 상황이 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

[심영구]

제 주변이나 이렇게 뭐 쭉 보면은 세월호 참사에 대해 일 년 정도 지나면서 반응이 세 가지 정도로 갈리는 것 같아요.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분들도 있고, 불편하다 저런 것 이해는 가지만 계속 이렇게 다루고 하는 거 불편하다. 힘들다 그런 사람들이 있고, 이제는 지겹다. 그만 좀 해라 세 가지 정도인 것 같은데.

 

다 공통적으로 ‘잊지 않겠습니다.’ 하는 분들은 조금 다른 것 같긴 한데…

 

공통적으로 깔려 있는 게 불편하다, 지겹다라는 게 공통적으로 깔려있는 게 무력감 같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해서 잊지 않겠다 그러고 뭘 바꾸겠다. 그러고 뭐 한다고 해서 뭐가 바뀌나? 진상규명이 되게 있나, 안전이란 게 강화된 것이 있나, 누가 책임을 지긴 했나, 결국 유족들 저러고 있다가 나중에 지쳐서 나가떨어져 나가고 그러고 끝나는 거 아니냐.

 

이 사회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니냐?

 

이런 식의 무력감이 내제되어있는 게 아닌가 하는데 저 자신도 사실 왜 그런지 모르게 4월이 가까워지면서, 술도 그렇게 당기고 일도 하기 싫고 뭐도 쓰기 싫고 그래서 되게 무기력하게 4월을 좀 보내고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도. 내가 1년 전 지금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언론이 기레기 소리를 들으면서 저도 큰 충격을 받으면서 트라우마가 계속 남아있는 상황인데… 나는 뭘 했나.

 

내가 그 동안 나와 조직과 내 동료들이 한 것들이 뭐를 바꿨나 나는 노력이라도 했나, 제대로 했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그런 무력감에 빠져있었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런 걸 어떻게든 조금씩 바꿔가야… 되게 진부한 얘기기는 한데, 식상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조금씩 바꿔가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또 하게 되요. 그거 말고는 답이 없는 것 같고.

 

항상 4월이 되면 최근 몇 년 동안에 다시 리바이벌처럼 해서 히트하는 ‘벚꽃엔딩’이라는 노래가 있잖아요? 되게 제가 좋아하는 노래고 노래방에서 많이 불렀던 노래인데… 이게 이번 4월에는 그 앞에 그대여, 그대여. 하고 시작하는 부분이 저는 좀 달리 들리는 거예요. 이를 테면은 김소월 시인의 ‘초혼’.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저는 약간 그런 느낌이 들면서 이 4월의 그대여 그대여 하는 게 가족들이 내 자식들, 희생자들을 부르는 거 하고 너무 겹쳐서 들려가지고 잘 듣지를 못 했는데… 그런 제 앞서 말씀 드렸던 무력감 부분하고도 맞닿아 있는 것 같고…


그래도 유족들은 광화문에서 계속 농성을 하시고 또 정부 앞에서 하시고 그렇게 하시는 모습들을 보면서 뭐 이게 다 사회를 안전하게 만들어가겠다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라고 희망을 갖고, 저도 좀 무력감에서 탈피해야겠다. 조금씩 노력을 해야겠다 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