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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길' 바꿨더니 '로봇랜드로'..함부로 지은 이름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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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길, 야동길, 사정길, 부고길, 할렘가, 시청길, 도청길, 미용실길...



장난이 아닙니다. 2008년 당시 실제로 있었던 길 이름입니다. 도로명 주소 사업이 시작되면서 전국 각 지자체별로 도로 이름을 다듬기 시작했는데 그때 있던 길 이름입니다. 뜻은 다를지언정 우리말로는 거북한 이름, 특정 기관이나 업소가 이전하면 바뀌어야 할 이름 등 재정비해야할 도로명이 이미 5년 전 조사로도 14만 개나 됐다네요. 이때 지적을 받았기 때문인지 황천길과 할렘가, 부고길과 00미용실길 등은 바뀐 것 같습니다.('도로명 주소 안내시스템'에서 검색해도 나오지 않습니다. 야동마을, 사정리 등에서 유래했다는 야동길, 사정길, 그외 시청, 도청길은 남아 있습니다.)


-로봇랜드로, 크리스탈로, 웰빙길, 스포츠로, 엘씨디로, 엘지로, 디지털로, 엑스포로, 테크센터로, 모듈화산업로, 로터리길...


2013년 현재 있는 길 이름입니다. 그리고 내년부터는 부근 주민들은 이 길 이름을 공식 주소로 써야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시작은 사소합니다. '엘지로'를 처음에 들었을 땐 그럴 수도 있지 싶었습니다. '엘씨디로'는 조금 더 별로였지만 그러려니 했죠. 크리스탈로, 웰빙길, 테크센터로... 그러다 로봇랜드로에 이르렀을 땐 이게 뭐야 싶었습니다.

-취향이야 다르다지만...

로봇랜드로를 직접 찾아가봤습니다. 주변은 황량했습니다. '도로명 주소 안내시스템'에 나와있는 '로봇랜드로' 이름 부여 사유는 "도로구간 내 로봇랜드가 위치하여 그 명칭을 따 명명"이네요. 한참을 돌아다녀도 로봇랜드는커녕 공사하는 땅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알아보니 2013년 4월 완공 예정이던 로봇랜드는 경기 침체 등의 이유로 아직까지 착공조차 못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언제나 지어질까 싶기도 한데 길 이름은 로봇랜드로입니다.

청라국제도시에는 에메랄드로, 루비로, 사파이어로, 크리스탈로 등이 있습니다. 지역 개발을 맡은 LH의 개발 프로젝트 이름이 그대로 도로명이 됐다고 합니다. 송도국제도시에는 센트럴로, 하모니로, 벤처로 등이 있습니다. 국제도시라서 이렇게 지었나 싶기도 한데 여기서 만난 주민들은 "도로 이름만 국제도시냐"며 일부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Crystal + 路'를 '크리스탈로'로 표기했으니 영어와 한자와 한글의 만남이기는 합니다.

여기까지는 취향에 따라 좋거나 싫다는 느낌이 갈릴 수 있습니다. 외국어나 외래어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서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크리스탈로 같은 이름이 세련됐다거나 외국인도 알아듣기 쉬울 거라고 선호하는 분도 있겠죠.

-내년이면 사라진다

지난 6월 3일, 일부 학자와 불교단체 회원 등 63명은 함께 도로명 주소법에 대해 헌법 소원을 냈습니다.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전통 문화 향유권을 도로명 주소가 침해하고 있다는 이유에섭니다. 헌법 소원 심판 청구서를 구해 읽어봤습니다. 도로명 주소가 전면 시행되면 전통문화로서의 가치와 역사적 의미가 있는 동/리 지명이 폐지될 것이란 주장입니다.

헌법 소원 제기를 주도한 박호석 전 농협대 교수는, 한 달에 걸쳐 직접 조사를 해보니 내년부터 도로명 주소가 유일한 법정 주소가 되면 전국적으로 4~5천 개의 지명이 사라진다고 주장했습니다. 박 교수의 주장대로면 서울 종로구에서는 72개 동 중에서 59개의 동 이름이 없어집니다. 박 교수의 계산법은, 예를 들어 종로구 서린동이 있는데 서린로도 생긴다면 '서린'이라는 이름은 남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없어지는 것입니다. 좀 길지만 헌법소원 심판 청구서에 적혀있는 종로구 59개 동의 유래를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종로구 59개 동의 유래

가회동 : 조선조 행정구역인 ‘가회방’에서 유래
경지동 : 조선조의 행정구역인 ‘견평방’에 의금부가 있었으며, 의금부에서 재판할 때 뜻을 세워 바르게 했다는 의미에서 유래
경운동 : 조선조의 행정구역인 ‘경행방’과 부근에 있는 운현궁의 이름에서 유래
공평동 : 조선조의 행정구역인 ‘견평방’에 의금부가 있었으며, 의금부에서 재판할 때 공평하게 했다는 의미에서 유래
관수동 : 청계천에 흐르는 물을 이곳에서 관망한다는 의미에서 유래
관철동 : 이곳의 옛 지명인 관자동과 이곳에 있던 철물교에서 유래
관훈동 : 이곳의 옛 지명인 관인방과 훈동에서 유래
교남동 : 교남파출소 자리에 있던 돌다리를 기준으로 남쪽을 지칭한 이름
교북동 : 교남파출소 자리에 있던 돌다리를 기준으로 북쪽을 지칭한 이름
구기동 : 상평방에 있던 어떤 시설의 터를 ‘구터’라고 했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한 이름
궁정동 : 이곳의 옛 지명인 육상궁동과 박정동에서 유래
권농동 : 이곳에 있던 채소재배시설인 농포서에서 농사를 장려한다는 의미에서 유래
낙원동 : 탑골공원이 낙원같이 아름답다고 하여 지은 이름
내수동 : 호조의 관청인 내수사에서 유래
내자동 : 호조의 관청인 내자사에서 유래
누상동 : 연산군 때 지었다는 누각이 있었는데, 그 윗동네를 의미
누하동 : 연산군 때 지었다는 누각이 있었는데, 그 아랫동네를 의미
당주동 : 이곳의 옛 지명인 당피동가 야주현에서 유래
도렴동 : 궁중에서 쓰는 직물을 염색하는 도렴서에서 유래
돈의동 : 돈녕부가 있었던 돈녕동과 어의동에서 유래
동숭동 : 조선조의 행정구역인 숭교방 동쪽이라는 의미
묘  동 : 종묘에서 유래
무악동 : 무악재에서 유래
봉익동 : 임금을 의미하는 봉황과 거처(궁궐)을 의미하는 날개라는 뜻
부암동 : 세검정 부근의 부침바위(부암)에서 유래
사간동 : 경복궁의 건춘문 건너에 있던 사간원에서 유래
서린동 : 조선조 행정구역인 서린방에서 유래
소격동 : 이곳에 있던 삼청전에 제사를 올리는 소격서에서 유래
송월동 : 예전의 송정동과 송월동을 합친 이름
송현동 : 이곳에 있는 솔고개에서 유래
수송동 : 조선조 행정구역인 수진방의 수동과 송현에서 따온 이름
신교동 : 신교 소방파출소 부근에 새로 놓은 다리가 있다고 지은 이름
신문로 : 서대문을 새문으로 부른데서 유래
신영동 : 조선 영조 때 새 군영(총융청)이 들어서면서 나온 지명
안국동 : 조선조의 행정구역인 안국방에서 유래
연건동 : 조선조의 행정구역인 연화방과 건덕방에서 유래
연지동 : 연화방에 연못이 있었던데서 유래
예지동 : 유학의 4부학당 가운데 하나인 동학이 인근에 있어서 유래
와룡동 : 창덕궁이 ‘임금의 처소(와룡)’라는 의미
운니동 : 운현궁과 이곳의 옛 지명인 니동에서 유래
원남동 : 창경원 남쪽이라는 의미
원서동 : 창경원 서쪽이라는 의미
익선동 : 조선조 행정구역인 정선방의 익랑골에서 유래
인의동 : 유학의 4부학당 가운데 하나인 동학이 인근에 있어서 유래
장사동 : 청계천의 모래가 긴 뱀처럼 보인다 해서 생긴 이름
재  동 : 수양대군이 황인보를 참살할 때 피비린내를 덮으려고 재를 뿌렸다고 해서 잿골이라 했음.
적선동 : 조선조의 행정구역인 적선방에서 유래
중학동 : 이곳에 있었던 조선조 교육기관인 중부학당에서 유래
창성동 : 청송당이라는 건물에서 유래, 청송이 창성이 됨.
청진동 : 조선조 행정구역인 징청방과 수진방에서 유래
체부동 : 이곳에 있었다는 조선조의 체부청에서 유래
통인동 : 옛 지명인 통곡과 인왕산에서 따온 이름
평  동 : 거평동을 줄여 지은 이름
행촌동 : 옛 지명인 은행동과 신촌동에서 따온 이름
홍파동 : 옛 지명인 홍문동과 파발동에서 따온 이름
화  동 : 조선조에 꽃을 기르는 장원서가 있던 화개동에서 유래
효제동 : 유학의 4부학당 가운데 하나인 동학이 인근에 있어서 유래
훈정동 : 이곳에 물이 따뜻한 우물이 있었다는데서 유래




이런 동 이름이 영원히 보전할 가치가 있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 동 이름 주소가 외국어-외래어 도로명 주소로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북촌로, 무교로, 율곡로 등으로 합쳐집니다. 하지만 잿골이란 이야기가 담겨있던 재동은 없어지고 정부 청사가 있는 도렴동도 잊혀지겠죠. (안전행정부에서는 당분간 괄호 안에 동 이름도 함께 적기 때문에 없어지진 않는다고 설명하는 듯합니다. 이런 괄호 안 병기 형태가 얼마나 갈까요, 1년? 2년? 동 이름이 법정 주소에서 빠지면 사라진다는 쪽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종로의 이 동 이름은 길게는 5백 년, 짧게 따져도 백 년 가까이 됐습니다.

서울 전역으로 넓혀보면 이렇게 사라지는 동명이 190개 정도, 전국에서는 4,5천 개라는 겁니다. 특히 리 단위는 병기도 하지 않기 때문에 아예 사라지는 거죠.

-누가 이름을 함부로 하는가

어렴풋합니다만, '누가 이름을 함부로 짓는가'라는 라디오 광고가 어렸을 때 참 인상적이었는데요, 함부로 새로 이름을 짓고 또 함부로 있던 이름을 없애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교차하니 지금의 도로명 주소, 이대로 좋을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지명, 지역적 특성, 역사성, 위치 예측성, 연속성과 지역주민의 의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심의까지 거쳐 정한다는데 대부분은 잘 지었겠죠. 그런데 왜 일부 이름은 저 모양일까요.)

도로명 주소, 이미 결정됐고 바꾸기 쉽지 않습니다. 3년이 지난 뒤 해당 구간 주민 절반 이상이 동의해야 가능합니다. 저마다 먹고 살기 바빠서 이런 문제는 쉽게 익숙해지고 또 잊혀집니다. 그렇게 하나 둘 사라져가는 것들이 많습니다. 안타깝죠. 이런 걸 자꾸 끄집어내서 환기시키는 게 저 같은 자들의 소임 같습니다.

**관련 자료를 찾다 발견한 어느 글의 한 토막, 크리스탈로-엘씨디로는 크리스털로-엘시디로가 맞답니다. 외래어 말로 바꾸더라도 한글맞춤법(외래어표기법)에는 맞게 바꿔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