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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보건과 복지 사이 두번째

"당신 자녀라도 그렇게 치료했을까요?"...진료빙자 성추행 막으려면



*어떤 판결

A.
-피해자들은 00센터 및 법정에서 일관하여 피고인이 수기치료를 하면서 피해자들의 성기를 만졌다고 진술했고...
-피고인은 다른 환자들과 달리, 피해자들에 대하여는 시술 전 치료의 필요성 및 시술방법, 시술 주체, 시술과정에서 시술자의 손이 피해자들의 성기에 닿을 수 있다는 점 등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고 시술에 관한 사전 동의도 받지 않았다.
-피고인은 피해자들의 진료기록부에 수기치료 내역을 전혀 기재하지 않았다.
-피해자 00의 경우엔 피고인이 직접 반바지를 벗긴 적도 있었고 피해자 @@의 경우엔 속옷까지 다 벗도록 하고 모포 등으로 가리지도 않은 채 수기치료를 하였다. 또 간호사를 입회시키지도 않았다.
-피해자들이 피고인을 수사기관에 신고하자, 피고인 측은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피해자 측 가게에도 찾아와 합의를 종용했다.
-피고인은 내원한 환자가 젊은 여성인 경우 평균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치료했다.


B.
-피고인의 수기치료 자체가 추행 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피해자들의 진술만으로는 시술 과정에서 피고인이 피해자들의 성기 부위 등을 만진 것이 추행 목적에 기한 고의적 행위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피고인 측이 용서를 구하며 합의를 종용했으나 피고인 측은 이 사건으로 한의사 자격을 상실할 수도 있어 사건을 조기에 무마시키기 위해 그리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므로 이런 사정이 피고인에게 피해자들에 대한 추행의 범의가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정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난 2월 한 법원에서 나온 판결문의 주요 내용이다. 사건은 한의원에서 한의사에게 수기치료를 받은 10대 여학생 2명이 치료 과정에서 성추행을 당했다며 이 의사를 형사 고소하면서 벌어진 재판의 결과다.


A는 '의심스러운 정황의 존재'. 재판부는 "피고인이 수기치료를 빙자하거나, 수기치료를 기화로 피해자들을 추행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이 들기는 한다"고 밝히면서 그 내용을 A와 같이 열거했다. B는 '공소사실의 인정 여부'. 재판부는 '이 사건의 각 공소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렵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1심은 "범죄사실의 증명이 없는 때'에 해당한다며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엇갈린 판결...피해자는 주로 10대 소녀

비슷한 내용인데 최근 다른 결과가 나온 사례도 있었다. 한의사에게 '성장치료'를 받았던 여중생이 성추행을 당했다며 역시 형사고소했는데 2심에서 징역 1년, 성폭행 교육프로그램 40시간 이수가 내려졌다. 1심은 징역 1년 6개월이었는데 이보다는 좀 줄었다. 2심 재판부가 1심에서 검사가 기소한 성추행 4차례 중에 2차례는 검찰의 증거가 충분치 않다며 인정하지 않아 형량이 줄었다.

한 소아과 의사는 변비 증상으로 찾아온 여중생의 신체에 성기를 밀착하고 침대에 눕혀 속옷 안까지 손을 넣어 누른 혐의를 받았다. 1심에서는 "변비 증상을 호소하는 여성에 대해 행해지는 통상의 복부촉진 방법을 넘어섰다"며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해 벌금 천만 원을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치료와 무관하거나 치료 범위를 넘어 환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의도 하에 이뤄진 추행행위로 평가할 때에는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증명이 필요하다"면서 무죄라고 판단했다.

위의 세 사건 모두 2013년 발생해 2014년과 2015년 판결이 나왔는데 의사의 진료행위 과정에서 성추행을 당했다는 것 외에 피해자가 모두 10대 소녀라는 공통점이 있다.(법적으로 이 의사들이 전부 무죄가 나왔더라도 10대 소녀들이 이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당했을 것이라는 데 이견은 없을 것 같아 '피해자'로 통칭한다.)

왜 10대 소녀일까.

*"불쾌했지만 항의하지 못했다"

2013년 국가인권위에 제출된 <진료과정의 성희롱 예방기준 실태조사>를 보면 성인여성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11.8%가 '진료시 성적 불쾌감이나 성적 수치심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118명이다. 이중에서 해당 의료인에게 즉시 이의를 제기하거나 병원 책임자에게 책임있는 조치를 요구하는 등 적극 대응한 건 단 26명, 22%에 불과했다.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진료과정의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가 46.9%로 가장 많았고 '적극적으로 대응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아서'가 30.2%로 다음이었다. 

이들은 20대 이상 성인이었는데도 그러했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10대 소녀들은 더더욱 그랬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진료를 빙자해 성추행을 저지르는 파렴치한 의사들이라면 이런 10대들을 더 손쉬운 표적으로 삼았을 것이다. 위 사례 모두 '아동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기소됐는데 아동, 청소년에 대한 성추행 범죄는 일반 성인에 대한 범죄보다 처벌이 더 무겁다. 

*"진료의 일부이지 성희롱이 아니다"

환자와 의사의 인식 차는 컸다. 

-"산부인과 환자가 여성의사의 진료를 신청했는데 질 초음파 검사를 받을 때 사전 양해나 설명 없이 환자가 신청한 여성의사와 함께 남성 의사가 들어와 환자의 신체를 보는 경우"
(성희롱에 해당한다: 의사 58.5%, 환자 71.1%)

-"내과 의사가 청진기 진찰을 하던 중 사전 설명을 하거나 환자 동의를 구하지 않고 옷 안에서 브래지어를 들어올리고 가슴에 청진기를 갖다대는 경우"
(성희롱에 해당한다: 의사 56%, 환자 76.1%)

-"대학병원에서 성기나 유방, 항문 진료시 의과대학생 다수가 들어와 진료실 한쪽에 서서 진료를 참관하는 경우"
(성희롱에 해당한다: 의사 60.5%, 환자 77.2%)

-"60대 남성의사가 20대 여성환자에게 진료시마다 매번 '얼굴이 참 예쁘다, 네 남자친구가 부럽다'고 말하는 경우
(성희롱에 해당한다: 의사 90.5%, 환자 80.2%)

-"성인여성 환자가 심한 복통으로 응급실에 방문했을 때 응급실 의사가 환자에게 성경험 여부나 최근 성관계한 시기를 물어보는 경우"
(성희롱에 해당한다: 의사 9.5%, 환자 43.3%)

의료인들은 언어로 인한 성희롱 외에 진료 과정에서 이뤄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진료의 일부이지 성희롱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고, 환자들은 성희롱 민감도가 훨씬 높았다. 의사들은 치료나 연구 목적에서 환자의 신체를 접촉하고 물어보는 것이라고 하겠으나 환자 입장에서는 아무리 치료 목적이라고 해도 자신의 신체와 인격이 존중받기를 원하는 건 당연하다.

성추행, 성희롱에 대한 인식 수준은 분명 이전보다 높아진 만큼, 병원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성추행' 시비를 부를 수 있는 진료행위는 개선돼야 한다. 일부 의사들은 진료 중 성추행을 당했다며 항의하는 '꽃뱀'들이 있어 어쩔 수 없이 합의금을 줘야 했던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이런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개선의 당위성은 생긴다.

(위의 실태조사를 바탕으로 국가인권위는 2014년 9월 <진료과정 성희롱 예방 안내서>를 마련해 발표했다. "인식 격차를 줄이고 성희롱을 예방하기 위해 진료과정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성희롱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판단기준, 성희롱 구제기관과 절차 안내, 진료과정에서 이용자들이 자주 호소하는 사례와 그 예방법 등을 본 안내서에 제시하였다"는 게 발간 취지다. 현장에서 얼마나 효과를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사전고지''제3자 참관'을 의무화시키자는 주장...문제는 시간 

환자단체연합회는 가칭 '진료빙자 성추행 방지법'을 제정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의료인이 성추행 우려가 있는 신체부위를 진료할 때에는 환자에게 '진료할 신체부위, 진료이유, 원하지 않으면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 등'에 대해 미리 알리는 것을 의무화하자는 내용이다. 또 간호사나 보호자 같은 제3자가 진료시 참관하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시키자고 하고 있다. "의료인의 정당한 진료를 보장하고 환자의 성추행 오해도 방지해 의료인과 환자가 더욱 신뢰하는 의료 환경을 만들려고 한다"는 게 입법 청원을 하는 취지다. 일부에서는 "사전 고지가 의무화돼도 사전 고지하고 성추행하면 소용 없는 것 아니냐"고 반박하는데 이는 모든 법에 해당할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다. 이번 19대 국회가 1년도 채 남지 않은 데다 내년이면 총선 때문에 법 제정이나 개정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이뤄질 수 없다. 19대 국회가 끝나면 그 안에 제출됐던 법안은 모두 자동폐기된다. 20대 국회에서는 새로 시작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올해 안에 발의부터 본회의 통과까지 진행돼야 할텐데, 물리적인 시간이 많지 않다.

처음 사례로 들었던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 학생은 사건 당시에도 충격을 받았지만 1심 선고 이후에도 더 큰 좌절을 맛봤다고 했다. 하지만 이를 추스르고 환자단체연합회와 함께 연내에 '진료빙자 성추행방지법'이 마련되도록 하는데 힘을 보태겠다고 나섰다. 상처받았지만 다시 일어선 10대 소녀의 분투가 헛되지 않도록 좋은 성과가 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해당 사건을 자문했던 한 의사가, 저 재판의 피고인 의사들에게 묻고 싶었다는 말로 마무리한다.

"당신 자녀였어도 그렇게 했겠냐? 정말 그게 의료행위라고 생각해서 당신 딸이 똑같은 증상으로 온다면 속옷 내리고 똑같은 치료법으로 치료 해주었겠냐?, 고 묻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