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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보건과 복지 사이 두번째

국민연금공단 갈등...'사회적 물의'는 누가 책임져야 하나


●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책임을 지게 하겠다"


정진엽 보건복지부 장관이 10월 22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회의에서 한 말이다. 책임을 지게 하겠다는 대상은 최 광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다. 책임 지는 방식은 이사장직 사퇴다. 내년 5월까지가 임기인 최 이사장에게 그 전에 그만두게 한다는 거다. 공단 이사장의 임면권은 대통령에게 있기 때문에 절차대로 하려면 복지부 장관은 해임 건의를 할 수 있다. 그런 절차 없이 스스로 물러나게 하겠다는 게 정 장관의 발언이다. 

장관이 언급한, 최 이사장이 일으킨 '사회적 물의'는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기금이사)을 연임시키지 않겠다는 결정을 독단적으로 내린 것이다. 홍 이사는 11월 3일이면 2년 임기를 채운다. 공공기관의 임원은 1년 연임이 가능한데 최 이사장은 홍 이사의 비연임을 결정했다. 지난 12일엔 홍 이사에게 연임 불가를 공식 통보했고 이에 앞서 정 장관을 만나 홍 이사를 연임시키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보건복지부

보건복지부

● '비연임 결정'이 사회적 물의?

최광 이사장이 홍완선 이사의 비연임을 통보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뒤 '월권' 논란이 먼저 불거졌다. 최 이사장이 기금이사의 비연임을 결정하려면 복지부 승인을 거쳐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국민연금공단은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임원의 연임 여부 결정은 공단 이사장이 하도록 돼 있다고 밝혔다. 1999년 기금운용본부가 출범한 이래 총 6명의 기금이사 중 연임된 사례는 2012년 한 차례였고, 이전에도 이사장이 결정해 연임시키지 않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즉 '월권'이 아니라 정당한 권한 행사였다는 반박이다.

복지부는 이런 반박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10월 14일 최 이사장에게 공문을 보냈다. 연임 불가 결정을 재검토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공문에서 "공단 이사장의 기금이사 비연임 결정은 그 근거와 절차에 있어 미흡하고 부적절한 조치라고 판단되며 이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특히 공단 내에서 이사장과 기금이사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내부인사문제에 대한 부적절한 조치 등으로 국민연금기금 운용 및 공단 운영에 대한 국민들의 우려를 불러일으킨 점은 이사장으로서 책임을 져야 할 부분으로 판단된다" "이사장께서는 기금이사 비연임 결정을 재검토해 주시고 조직 안정과 정상화를 위한 책임있는 조치를 취해주시기 바란다"며 비연임 결정을 철회하고 사실상 사퇴할 것을 종용했다.

이때까지는 복지부가 공단 이사장이 기금이사의 비연임을 결정한 건 잘못됐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하지만 22일 국회 복지위 전체회의에서 김용익 의원이 "이사장이 비연임을 결정하면서 복지부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지적했고 정 장관도 "발언을 잘못했다, 정정하겠다"면서 승인이 필요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즉, 복지부는 공단 이사장이 기금이사의 연임 여부를 결정하는 것을 복지부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잘못 알고 있었고 이를 근거로 이사장의 결정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는 공문을 보내고 사퇴를 종용했던 것이다.

연임 결정의 적정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결국 잘못된 근거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건 복지부인 셈이다. 

● '비연임 결정' 잘못됐다더니 "기금이사도 사퇴시키겠다"

14일 복지부 공문을 받은 최 이사장은, 사퇴할 이유가 없다면서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공식 입장은 밝히지 않고 있다. 일부 기자와의 통화에서 복지부에 모종의 제안을 했고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정진엽 장관은 22일 복지위 회의에서 "(최 이사장이) 29일 국제 행사가 있어 이 행사를 마치고 사퇴하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장관은 "둘 다 물러나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데 책임을 지고 최 이사장과 홍 이사가 함께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복지부는 최 이사장의 애초 결정, 즉 홍 이사를 비연임시키기로 한 게 잘못됐다는 입장이었다. 뒤집어 보면 홍 이사를 연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2년 동안 홍 이사가 400조 원이 넘는 국민연금 기금을 대체로 큰 무리 없이 이끌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니, 기금 운용의 안정성을 위해서 앞으로 1년을 더 하도록 하자는 입장, 복지부가 가질 수 있다.

( 홍 이사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만난 사실이 뒤늦게 국감 과정에서 확인되면서 물의를 빚었고 경제개혁연대 등은 '삼성 특혜' 논란으로 연금의 신뢰를 떨어뜨렸다며 연임을 반대해왔다. 복지부 입장을 가정하는 것이니 이 문제는 일단 제쳐놓는다. 기금운용의 독립성 확보와 관련해 공사화 논란은 홍 이사와 복지부 입장이 같으니 역시 제쳐놓는다.)

그런데 복지부가 문제 삼던 '비연임 결정의 부적절성'이 문제가 아닌 것으로 드러나자, 홍 이사의 연임 필요성까지 없던 것으로 한다? 연임시킬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정진엽 장관은 "연임시키려면 이사장이 요청해야 하는데 요청하지 않았으니 자동으로 끝난다"고 말했다. 비연임 결정이 잘못됐다고 하다가, 이제는 이사장이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임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불과 일주일 사이에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를 해도 되는 걸까.

● "청와대와 논의했지만 판단은 내가 했다"

홍 이사는 10월 23일에 자진 사퇴한다고 해도 임기 만료 11일 전이다. 자진 사퇴할 가능성도 낮지만 그냥 있어도 곧 임기가 끝난다. 반면 최 이사장은 내년 5월까지가 임기인데, 장관 말처럼 10월 29일 즈음에 사퇴한다면 무려 일곱 달 전에 사퇴하는 것이다. 형평이 전혀 맞지 않는다. 여기에 정작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복지부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 

정진엽 장관은 청와대 지시를 받았냐는 질문에 "논의를 하기는 했지만 내가 판단해서 결정했다" "내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고 답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의 복지부는, 그리고 장관은 참으로 무책임하고 비논리적이다. 사실이 아니라면 안타까운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