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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서울을 거닐다 생각

"양육수당 끊기나?"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부모

*블로그 만들면서 올해 쓴 취재 뒷얘기를 옮깁니다.

2013.5.29.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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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달 기다리던 25일인데...

저희 회사 월급날은 매달 25일입니다. 이번 달엔 25일이 토요일이다보니 전날인 24일에 월급이 나왔습니다. 근로 의욕이 가장 고취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만큼은 아니겠지만 다른 이유로 이 25일을 은근히 기다리는 가정도 일부 있습니다. 양육수당이 나오는 날이라서죠.

집에서 6세 미만 아이 키우는 가정이 그런데 연령에 따라 최대 20만 원이 나오니까 제법 쏠쏠하겠죠. 그런데 이 25일을 앞두고 지난주 충남 아산시의 일부 가정엔 웬 공문이 왔습니다.

아산시 공문 일회용
예산이 부족해 양육수당을 늦게 지급한다는 내용입니다.

부모들은, 주로 엄마들은 불안하다는 반응을 쏟아냈습니다. 이번 달은 늦게 준다고 하지만 다음 달부터는 아예 끊기는 거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다른 지역 엄마들도 이거 잘못되는 거 아니냐는 반응이었습니다.

담당 공무원은 조금 늦어질 뿐 지급하지 못하는 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대상자가 대폭 늘어나면서 어려워진 부분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지난해엔 양육수당 지급 대상자가 500명이었는데 올해 3월부터는 무려 1300%가 늘어나 6527명이 됐다는 겁니다. 어찌됐든 시의회에서 추경 예산을 통과시켜줬기 때문에 올해 말까지는 문제 없이 지급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 중앙정부 대 지방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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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 경우에는... 전국 평균 편성금액보다 매우 낮은 것으로 조사됨

...지자체가 책임져야 할 부담분을 확보하지 않은 데 원인

...재정자주도가 서울(재정자주도 88.5%)보다 매우 열악한 자치단체들도 당초 정부안에 따라 예산을 편성

...반면, 재정자주도가 전국에서 가장 높은 서울시는... 타 지자체에 비해 예산편성 의무이행 의지가 매우 약한 것으로 나타남

...편성비율 결과를 살펴보면 서울시 본청(8.1%)이 자치구(26.6%)에 비해 예산 확보 노력을 덜 한 것으로 나타남.

...서울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도 및 시군구에서 향후 추경예산 편성을 계획 중인 것으로 제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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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부 보도자료 일
위 내용은 복지부가 지난주 갑자기 내놓은 [보도참고자료: 2013년도 영유아보육료 및 양육수당 지방비 편성 현황]에서 발췌한 부분입니다.

거칠게 요약하면 "서울시는 무상보육이 잘 되게 하기 위한 의지가 없다" 정도... 서울시를, 그중에서도 서울시 본청을 공격하기 위해 내놓은 것 같다는 자료로 읽힐 정도입니다.

이에 대한 서울시 입장은 어떨까요, 반격..이라기보다 반박을 위한 긴급 브리핑을 자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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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추가 지원 없이는 무상보육 예산 감당 곤란...

...정부 주도 무상보육 확대, 재정부담은 지방에 전가...

...영유아보육료 국고지원이 타 시도는 50%, 서울시는 20%로 차등지원되고 있기 때문...

...무상보육 지속을 위한 정부 지원 절실...

...지방비 추가 부담이 없도록 하겠다는 정부 약속도 이행되어야...

...정부는 더 이상 불필요한 논쟁을 확산시키기보다는... 무상보육이 안정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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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서울시가 낸 [무상보육 관련 서울시 설명자료]에서 역시 일부 발췌한 내용입니다. 역시 대략 정리하면 "정부가 재정 추가 부담 없게 한다고 약속 해놓고 안 지킨다, 약속 지켜라" 입니다.


◆ '팩트'는 맞는데.. 해법은?

각자 주장의 '팩트'는 맞습니다.

지난 1월 무상보육 전면 실시를 규정한 영유아보육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3월부터 6세 미만 영유아에 대해 영유아보육료나 양육수당이 지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올해 무상보육 예산은 이미 지난해 짜놓은 것이기 때문에 새로 늘어난 부분만큼은 지자체에서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올해 내내 시행해야 하는 무상보육이 예산 부족으로 이제 겨우 석달 지나가고 있는 시점에도 고갈 징후를 보이고 있는 거죠.

무상보육 예산은 국고지원 50%, 지방비 50% 비율로 하게 돼 있는데 서울은 재정자주도가 높다 하여 20:80으로 서울 입장에서는 불합리하게 책정돼 있는 것도 맞습니다. (국고지원율을 높이기 위한 영유아보육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국회 법사위에서 제동이 걸려 있죠. 그러나 통과된다고 해도 적용되는 건 내년부터입니다.)

이에 대한 해법에서 정부와 지자체 특히 서울시의 입장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정부는 지자체가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서, 즉 원래 짜놨던 예산 외에 추가로 더 돈을 투입하라는 입장인 반면, 서울시는 경기 침체로 수입도 줄었는데 추가 예산 투입은 어려우니 정부가 책임지라는 입장입니다. 여기에다 정부는 원래 부담해야 하는 지방비도 덜 편성해놓았다며 서울시를 비난하고 있고, 서울시는 정부가 추가 재정부담은 없게 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지키지 않는다며 맞서고 있습니다.

서로의 주장이 다 일리가 있는데다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부분이기 때문에 섣불리 어느 편이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현재 서울시 담당 기자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 無信不立

이런 공방은 작년부터 올해 3월 무상보육 시행 이후에도 양상만 조금씩 달리 하면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느 쪽 하나 중재안이든 해결책이든 타협책이든 내놓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이른바 '보육 대란'의 조짐은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맨 처음 거론한 아산시 사례. 전국에서 처음으로 양육수당 지급이 지연되는 일이 발생했다, 고 하면 엄청난 사건인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고작 며칠 늦어지는 것인데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면 또 그런가 보다 싶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아산시를 시작으로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암울한 전망이 더해지면 그런가 보다 할 수만은 없습니다. 양육수당이나 보육료 안 받던 시절도 있었고 그때도 다 애들 잘 키웠다 그러니 무상보육 수당이야 끊길 수도 있겠지만 제게 가장 와 닿았던, 그리고 섬뜩했던 어느 네티즌 (어느 아이의 엄마 같은)의 말은 이거였습니다.

"이번엔 좀 다를까 싶었는데 역시 흐지부지더라고요. 정부가 하는 게 항상 그렇죠..."

이 정부(중앙정부, 지방정부 모두 포괄하는 말일 겁니다.)에 대한 불신이 반복적으로 쌓이는 것, 저는 이게 가장 무섭습니다.

문득 떠오른 <논어>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마칩니다.

자공(子貢)이 정치(政治)에 관해 묻자, 공자는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足食), 군대를 충분히 하고(足兵), 백성의 믿음을 얻는 일이다(民信)”라고 대답하였다. 자공이 “어쩔 수 없이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군대를 포기해야 한다고 답했다. 자공이 다시 나머지 두 가지 가운데 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묻자 공자는 식량을 포기해야 한다며, “예로부터 사람은 다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백성의 믿음이 없이는 (나라가) 서지 못한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고 대답했다.